3만 농민군의 피빛눈물 이야기: 우금치고개 전투
<<민족해방투쟁의 성지를 찾아서>> 2편 우금치고개
척양척왜의 깃발은 부러지고....우금치고개 전투
-------우금치고개 전경, 대나무인간이 우리를 맞아준다----
1894년 11월9일, 전봉준은 관군을 우금치고개로 몰아넣었다 저고개만 넘으면 공주성을 단숨에 함락하고
서울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우금치를 둘러싸고 삼면 30-40리에 걸쳐 3만농민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북소리,징소리,함성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였다
한편 신정희,이규황,이규태가 이끄는 관군2500명과 모리오대위의 일본군200명은 우금치고개를 중심으로
강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농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동학농민혁명전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고 처절했던 우금치고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당시 농민군이 진격했던 능선은 지금은 사라지고 부여-공주간 도로가 뚫려있다--
북소리가 울렸다 나는 능선을 기어올랐다 총알이 피해간다는 부적을붙였다 입속에서 시천주 되내이며 나아가고 달려갔다 적들의 기관총과 소총들이 불을 뿜었다 사정거리너머에서 쏘아대는 적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이 일어난다
고지가 바로저긴데...무릎이 꺾이고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오면서 왜이리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일까...몸이 앞으로 쓰러져간다..
"아아 저들 비류(농민군) 수만의무리가 40-50리에 걸쳐 두루 둘러싸 길이 있으면 싸워서 빼앗고 높은 봉우리를
점거하며 동에서 소리치면 서에서 따르고 왼쪽에서 번듯이며 오른쪽에서 나타난다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릎쓰고 앞을 다투어 기어오니, 도데체 저들은 무슨의리, 무슨 담략을 지녔기에 저렇게 할 수있는 것인가 저들의 행동을 말하고 생각함에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관군 선봉장 이규태)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개틀링기관총
19세기말에 등장한 기관총은 고속연속 사격으로 대량살상을 가능케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돌격술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전술은 방어전(참호전)으로 바뀌는 전쟁사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두번돌격하고 1만여명의 군병을 점고하니 3천여명이 채되지 않았고 다시 두번접전하고 점고하니 5백여명에
불과했다"라고 전봉준이 말할정도로 전투의 양상은 비참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분당400발을 발사하는 개틀링기관총과 사정거리500여보에 분당15발을 쏘는 스나이더,무라다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농민군은 분당2발 사정거리100여보의 화승총만 들고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 대부분은 죽창과 칼,활로 무장했으니 일본군 한명이 농민군500여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
농민군이 고개를 넘고자하면 일본군은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0-50여 차례,
농민군의시체가 온산을 가득 메우고 그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전투는 이후 11일까지 계속되었지만,이미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우금치고개 정상 외진 곳에 서있는 농민혁명기념탑,탑은 낡고 찾는이조차 없다
하지만 농민군이 그토록 염원했던 자리에 앉아 공주시내를 말없이 지켜보고있다-------
척양척왜의 깃발은 부러졌다 이후 농민군은 패주를 거듭하며 사라져 갔다 그뒤로는 관군과 일본군의 잔인한
보복이 뒤따랐다 이때 학살당한 사람들이 대략30-50만,이후 한일병합때까지 100여만명이 죽어갔다
구한말 조선인구가 약 이천만이었음을 감안할때 엄청난 숫자였다
---------------농민군을 처형할때 사용했던 작두--------
코소보에서 10만세르비아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을때 세르비아민족주의는 끝없이 불타 올랐다
발슈타트에서 3만폴란드병사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을때 폴란드민족주의는 한없이 깊어졌다
우금치고개는 한국민족주의의 시원이며 성지이다 제폭구민,척양척왜로 드러나는 반외세,반봉건을
특징으로하는 한국민족주의가 처음으로 역사에 굵고 진한 점을 남긴 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살아남은 농민군은 의병투쟁을 거쳐 일제강점기무장투쟁으로 연결되며 1910년대 민족해방투쟁의
주류가 된다
----고개밑에 터널을 만들어 정상부는 보존하였다-----
---------농민군을 상징하는 대나무사람 조형물이 서 있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우금치고개에 앉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