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경상도 보리문둥이의 유래

정암님 2008. 8. 25. 00:21

타지역인들은 경상도사람들을 보리문둥이라고 부르곤한다 내기억에 경상도사람들은

이말을 매우 싫어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서로간에는  스스럼없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그말의 유래를 경상도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는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한국역사연구회 칼럼을 보다가 해답을 찾게 되었다

기쁜 마음에 스크랩을 하려다가 본연구회의 모든게시물은 저작권법의보호..무단복제,전제금지..

라는 문구를 보고말았다 겁이 많은 나는 요약하고 내가 조금 첨언하는것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내용도 사족이 길구..)

이글은 한국역사연구회 이욱님의 글을 요약하고 본인이 약간 첨언했음을 밝힙니다

 

1.경상도를 대표하는 작물 -보리

한국사람들의 주식은 쌀이다 하지만 경상도는 산이 많았다 쌀이 부족할수 밖에 없었고

대체작물로 키운 것이 보리였다 과거기록을 보면 다른지역에서 쌀밥을 먹는시기인 겨울과

봄에도 경상도사람들은 보리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타지역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생각할때 먼저연상되는 것이 보리였다

보리문둥이라고 할때의 보리가 여기서 연유했던 것이다.

 

2.영남의 정치적 소외와 유소, 그리고 문동(文童)

다음은 문둥이의 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문둥이는 문동(文童)이라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것이다. 그리고 문동이라는 말은 조선후기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남인세력이 주류였던 영남정치세력은 숙종초 기호남인이 몰락하고, 영조초기 이인좌의 난에

적극 가담함으로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이제 정치적으로 실각한 영남남인들이 중앙정계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수 있는수단은

집단상소(유소)뿐이었다

조선은 사림정치를 표방했다 그래서 언로를 개방했고 유생들의 언동에 귀를 기울리고 ,

그것이 조정의 비위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었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18세기 이후 영남 남인들은 영남의 거의 모든 유생이 서명한 유소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때로는 많은 수의 유생을 확보하기 위해 상소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유생을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한 번의 상소에 만명이 서명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영남 남인의 정치적 소외가 뚜렷해질수록 상소에 서명하는 유생 수가 증가하였다.

정조 이후 영남 유생 만명이 서명한 상소라는 의미의 영남만인소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

었다. 이렇게 만인소가 작성되면 상소의 맨처음에 서명한 이-이를 소두(疏頭)라고 한다-와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유생들이 함께 상경했다. 그리고 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 거리를 활보하였다. 19세기

서울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회적 풍모가 드러났고, 서울 사람들의 옷맵시는 매우

세련되었다. 영남 유생이 쓰는 사투리와 시대에 뒤진 복장은 서울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서울 사람

들은 상소를 하러 올라온 영남 유생을 보고, 영남의 보리 문동(文童)들이 또 상소를 올리러 왔구나

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러한 회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남 사람하면 ‘보리문동’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던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