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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답사(2):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시간여행

정암님 2009. 3. 24. 05:27

나주는 넓은 평야와 바다라고 불릴정도로 넓은 영산강을 끼고 있어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삼국시대의 독자적인 영산강세력의 존재를 보여주는 옹관고분군

들,불교유적,유교유적,개항후 일제에 의해 개발된 영산포 근대유적과 현대사의 굴곡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과 사건현장들을 지니고 있다

 

농업과 어업,국제교역을 통해 많은 잉여물을 축적하고 이를 기반으로 강력한 지방세력이 형성되었다 

영산강 옹관묘세력이나 왕건과 연합하여 고려를 건국한 나주오씨세력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세인의 눈을 끌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주가 볼거리가 없다고

투덜댄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다 각 문화권을 개별적으로 본다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드물다

하지만 각시대별로 문화,역사적 흔적들을 모두 안고 있는곳도 드물다 그 드문곳이 나주다

그래서 나주는 통시대적으로 답사를 해야 하고 좋은 길눈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나주답사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다

이번 나문답답사는 덕산리옹관묘고분군-불회사,철천리불교문화권-나주향교,나주읍성과 동헌등 유교

문화권답사로 구성되었다 시간관계상 영산포근대문화권답사가 빠져서 아쉽다 개인적 욕심으로는 나주

관아 답사시간을 줄여서 영산포를 한바퀴 돌아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영산강의 폭이 해방직후에는 현재 강폭의 3배,일제강점기 초기에는 7배나 되어서 영산대해라 불렸다 한다

사진상의 하얀 건물은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진 등대 겸  수위측정소로 당시에는 강의 중앙부에 있었다고 한다-

 

영산포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개항직후였다 그 이전에는 잦은 홍수로 사람이 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일제는 호남내륙과 목포를 연결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임을 간파하고 제방을 쌓고 일본인들을 이주시켰다

관공서및 금융,행정기관도 세워졌다

번성했던 도시도 상류에 둑이 생기고 하류에 하구둑이 생김에 따라 물길이 끊어지고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포구는 몰락했지만 그시절의 모습은 남아 있었다  나주평야의 쌀들을 도정하던 정미소들,일본인대지주들의

저택들이 지금도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청동여인상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이 들고있는 그릇에 동전을 넣는다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환님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소망을 동전에 싣고 정성을 들여 던졌습니다

무심한 동전은 그릇을 넘어 바닥에서 빙빙 돌고 있습니다

 

지방향교중 규모가 성균관과 비슷할정도로 빼어나다  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  

 

-나주향교 대성전의 주춧돌, 근처 사찰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 모두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조선조 불교의 비애가 느껴지지 않는가-

 

향교는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대성전이 우위이다

산자락같은 경사진곳에 지을때는 대성전이 뒤로 가야한다(전학후묘)높은곳에 위치해야 하기때문이다

평지에서는 뒤쪽이 앞에 가려 보이지않고 답답하다 그래서 대성전이 앞으로 나온다 나주향교는 

대성전이 앞으로 나온다(전묘후학) 평지이기 때문이다

 

나주목의 객사건물인 금성관 

 

-석공은 돌거북의 목을 비틀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울분이 덜어지기때문이다

때로는 귀부의 얼굴을 기괴하게 표현하고 신체를 불구로 만들어 탐관오리들에대한 적대감을 들어냈다-

 

지금도 비석거리라고 불리는 곳이 많다 과거에 송덕비,선정비,영세불망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기에

유래된 명칭이다 이들 비석들의 상당수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성을 떨던 조선후기에 세워진것들이다 

 비석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이 탐관오리들의 상투적 수법중 하나였다

어찌 이런 비석들 옆을 가만히 지나갈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은 돌을 들어 비석에 던졌고 발길질을 해댔다

이것이 비석치기라는 우리민족의 대표적 전래놀이의 하나가 되었다 그 사연은 이렇게 구슬프다

말 못하는 백성들이지만 그 한과 억울함을 놀이에 담아 후세에까지 전하는 것이다

 

 

드물게 보는 철제비, 철제비도 종종 만들어지지만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 징발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섬이나 외진곳에 드물게 남아있다 

 

 

나주 석당간 (보물49호)현재 발굴작업이 진행중이어서 중상층부가 해체되었다

 

해체되기 전의 석당간, 높이11미터이다 

 

나주읍성은 현재 복원중이다. 복원이 완료된 동문(동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