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석불사)은 어떤 가치가 있나? 국제 석굴운동의 종착지:인도에서 경주까지
석굴암은 인간이 만들어낼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 석굴암의 구조는 그 평면과 입면
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수리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
이 이루어져 있었다. 엄청난 무게의 돌을 깎아 세우면서도 10미터에 1밀리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20세기들어 보수를 거듭하면서도 온전한 보존책을 여지껏 마련치 못하는 것은 현대의 기술만 과신하
고 고대인의 과학을 무시한 소치였다.
석굴암은 암자가 아니라 석굴사원이었다. 원래 석굴은 모든 종교의 초기 종교공간이었지만 ,임시방편적 공간이었다. 그런데 불교에서만은 석굴사원이라는 정식유형이 생겼고 불교가 국제적으로 전파되면
서, 전파된 지역에 석굴사원이라는 형태가 유행했다.
불교가 최초로 발생한 인도는 무더운지역이었다. 따라서 시원하고 어두운 석굴이 최상의 종교공간
이 되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인도에서는 암석을 파고 석굴을 만들어 그안에 도량을 세우기 시작했다.
석굴사원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로 구성되며 주실중앙에는 탑이 있어 참배자들이 이탑을
돌며 예배하였다. 석불암의 석굴도 기본구조는 이와 같다. 석굴사원은 기원후 불상시대로 넘어오며
주실에 불상을 모시게 되는데 이것이 국제적으로 퍼지게 된다.
석굴사원의 기본구조
불교가 해외로 퍼져나가자 전파된지역을 중심으로 석굴조성붐이 일어났다.
파키스탄의 바미얀,중앙아시아의 키질,베제클리크석굴등이 실크로드를 따라 조성되었고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자 둔황 막고굴,룽먼,윈강석굴이 만들어지고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하지만 한반
도에서는 좀처럼 석굴사원을 조성할수가 없었다.
중국의 암벽은 퇴적암층으로 파내고 조각하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한반도의 바위는 거의 화강암
이었다 화강암은 파내기도 조각하기도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이를 변형하여 백제의 서산마애불
처럼 바위에 새기거나, 고신라의 감실부처처럼 작은규모로 바위를 깍거나, 중대신라이후 군위삼
존불처럼 자연석굴을 이용한 석굴사원을 만드는등 여러 시도를 하였다.
군위 삼존불 출처:문화재청 홈피
그 실험과 염원의 끝에서 마침내 석굴암(석불사)의 석굴이 탄생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인공석굴을 만든 것이다.돌로 쌓고 흙을 덮은 축조석굴을 말이다. 그것도 주실의 천장을 반
구형의 돔으로 만들었다. 모르타르가 없던시대에 반구형의 돔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운동이 지리적으로는 9000Km를 이동해서.시간적으로는 천년의 긴 여정끝에
한반도의 동쪽 끝 경주 토함산에서 그 찬란한 마지막 꽃을 피웠다. 이것이 석굴암이다.
국제적 경향속에 석굴암이 있다고 하지만 그 형태와 내용은 독창적이었다.
첫째, 대부분의 석굴이 굴착석굴인데, 석굴암은 축조석굴이다
둘째,외국의 석굴은 수십개가 모여있는 군집형인데 석굴암은 단독형이다
단독형은 한국석굴의 특징인데 화강암이라는 단단한 암질때문이었다.단하나의 예외가
골굴암인데 골굴암은 12개의 작은 자연동굴로 이루어진 한국유일의 석굴군이다.
참조)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유홍준 저)
2.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김봉렬 저)
3. KBS 역사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