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백만명이 굶어죽은 경신대기근 3편/ 대기근은 조선을 어떻게 바꾸었나?

정암님 2014. 8. 20. 01:59

17세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시기 조선의 시대적 과제는 임진왜란이후 피폐된 민생을 회복시키고, 북방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듭된 대기근은 조선의 역량을 재해구제에 집중하도록 했고, 그만큼 과제 해결은 미루어졌다.

조선조 역사상 생존환경이 가장 열악했던 1651년부터 50년간, 조선조정과 각계각층은 내우외환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

한 대책을 마련하는데 분주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간에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빚으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나

갔다. 그 결과, 대기근으로 빚어진 모순과 왜란후에 던져진 과제를 어렵게 수습하고 새로운 틀을 제시함으로서, 영.정조

시기의 중흥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사회안정망의 구축

연이은 기근으로 기아자,아사자,유민들이 대량으로 발생하자, 조정은 기아자를 구제하는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었

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 재원을 무작정 쏟아 부을수는 없는 일이다. 효율적인 배분이 중요했다.

진휼업무를 총괄하는 진휼청은 상설기관이 되었다. 진휼청은 독자 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호조의 재정은 물론 강화도,

남한산성,평안도등지에 비축된 군사용 비상물량까지 끌어와 사용했지만, 언제나 역부족이이서 다수의 유민과 기아자,

아사자를 낳고 말았다. 이런 한계때문에 좀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했다.

 

조선은 국초부터 환곡제도를 운영해 기근에 대비했다. 그러나 기근이 심한 지역은 자체 보유 환곡으로 기아자를 살려 낼

수 없었다. 이 경우 조정은 강화도,평안도 등지에 있는 비상 비축곡을 배로 실어와 필요한 곳에 배분했다.

그러나 이런 원거리 이송 시스템은 매우 번거롭고, 선박동원의 어려움과 장기간 운송때문에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비축곡 이동방법을 원거리 이동에서 근거리 이동 체계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또한 다른 목적으로 비축한 곡물을

진휼곡으로 전용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 논쟁거리가 되어 실기하거나 방출후 회수문제로 논쟁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휼을 목적으로 하는 비축곡을 조성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그결과, 18세기 전반이후 각지의 바닷가에 창고를 설치하고 곡물을 비축해, 인근지역의 기근구제에 쓰도록 했다.

또한 각 고을에 자비곡이라는 진휼용 환곡을 운영토록 하고, 기본 재원이 없던 진휼청도  독자적인 환곡을 보유하도록

했다. 이를 토대로 18세기 전반에는 기근시 기아자에게 효과 없는 죽 대신 마른 식량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유상대출도

크게 실시할 수 있을 정도로 다량의 진휼곡을 비축할수 있었다.

환곡은 17세기 후반부터 늘기 시작해서 18세기 후반에는 최고 수준인 1000만석에 이르게 되었다. 19세기 들어와 감소

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800만석을 유지 하였다. 환곡1000만석은 쌀로 환산하면 600만석이니, 1년 세입이 400만석인

국가재정보다 더 큰 규모다. 또한 1인당 비축량으로 따진다면 중국의 5배이니, 국가가 저장한  곡물량으로는 당대 세계

수준이었다. 하지만 환곡의 관리가 부실하게 되어, 장부상으로만 기록된  곡물이 늘어나 1862년이 되면 전체 환곡의

54%나 되었다.

원래 곡물은 오래 보관하면 변질되고, 쥐가 먹거나 축이 난다. 그렇기때문에 수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민간에 대여하여

야 한다. 공납과 군포의 폐해가 시정되자 탐관오리들은 환곡에 눈독을 들였다.  환곡은 평상시에는 봄에 민간에 대여한 후

가을에 10%의 이자를 붙여 수취하였는데, 탐관오리들은 쌀에 겨와 모래를 반이나 섞어 빌려 주거나, 10%를 넘는 고리대

를 징수하는등 막대한 사익을 취했다. 심지어 빌리지도 않았는데 갚으라며 강제로 쌀을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19세기 들불처럼 일어난 농민봉기의 원인은 환곡의 문란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기아자 구제에 늘어난 환곡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18세기후반이후 기근이 줄자 방대한 비축곡은 또다른 사회문

를 몰고왔다.

 

세제개혁

연이은 흉작과 기근은 국가재정을 파탄상태로 몰아넣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조정은 대

대적인 세제개편을 단행했다. 핵심은 재정수입을 줄이지 않으면서 백성들의 부담은 줄여주는 것이다.

왜란이후 농지가 황폐화되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조정은 전쟁 중에는 급증하는 전비를 백성들에게

물렸다. 전쟁이 끝난후, 조정은 전비조달을 위해 붙인 부가세를 폐지하고 개간을 권장했으며 양전(토지 소유자 조사)을 실

시했다. 그럼에도 17세기 전반까지 토지 면적이 임진왜란 이전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것은 연이은 기근과 유망속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세금은 크게 토지수확량에 물리는 전조와 개인(성인남성)에게 물리는 군역(군포),호에 물리는 공물납이 있다.

이중 16세기이래 큰 문제가 된 것은 공물납이었다.

15세기 조선은 수입의 대부분을 전조로 거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공물이 차지하

는 비중이 늘어났다. 공물납은 이해관계자들이 많았다. 그 만큼 쉽게 처리할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 당시 공물납은 전조에 비해 10배이상 무거웠다. 또 적절한 수취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부담도 불균등했다. 큰읍보다는

소읍이 부담이 컸고, 지역의 권세가들은 자신들의 부담을 힘없는 백성들에게 떠 넘겼다.

하지만 17세기의 연속적인 대기근은, 이 개혁이 좌절되면 국가가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신료들이 공유하게 만들었

다. 결국 공물납을 현물 대신 토지에 부과하는 토지세화한 대동법이 탄생하게 되었다.  대동법하에서 국가수입은 줄지 않으

면서 백성들은 기존세금의 1/5정도만 내게 되었다. 대동법은 순차적으로 시행지역이 늘어났는데, 모두 기근이 든 해에  실

지역이 증가했다는 것은 기근과 당시 지배층의 위기의식이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동법으로 공물납문제가 일단락되자, 이제 조정의 관심은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또다른 복마전인 군포문제로 옮겨간다.

 

농업기술의 혁신

잦은 가뭄은 수차보급과 제언사 설치를 불러왔다. 농민들은 냉해를 피하기 위해 벼의 파종시기를 늦췄다. 그 이유로, 17세

기 전반기에는 망종과 하지사이에서 모내기가 이루어진다.

또 냉해에 대비해 조생종을 개발,보급했을뿐 아니라, 내한성이 강한 산벼와 한전적 수전농법이 권장됐다. 또한 밭에 심는

밀과 보리도 추위와 바람을 이기는 효과를 높이기 위해 밀작을 했다.

 

동전의 주조

진휼미로 국가재정이 거덜나자, 조정은 재원 확보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동전주조다.

그전부터 재정보전의 한 방법으로 거론되던 동전주조는, 1678년(숙종 4) 상평통보를 주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이후 진휼청에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찍어내기 시작했고, 1695년 을병대기근때는 무려 55만냥을 주조하기에 이른다.

이는 숙종4년이래 가장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이후 34년간은 한번도 주조하지 않았다.

동전주조는 대동법시행과 어울려 상품경제를 발달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다.

 

조선은 어떻게 대기근을 극복했나?

1. 자연조건: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한 지역안에서도 재해를 경미하게 입은 곳이 존재했다. 따라서 양식을 위에서 덜어

아래를 보충하거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며 융통을 했다.

2. 상부상조 정신: 공동체정신을 강조하는 유가사상의 영향으로 양반지주나 부농들이 적지 않게 기부를 했다.

3. 비교적 잘 갖추어진 조선의 재난대비 시스템

   중농주의를 표방한 조선은 기근을 중대문제로 인식하고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구황시스템을 구축했다.

   진휼청을 설치하고 비상시를 대비해 3년분의 비축곡을 곳곳에 조성했으며, 기근이 들면 이를 조운선을 이용, 방출

   했다. 각종 감세정책도 폈다. 잘 짜여진 조직을 이용, 기후와 작황,기근정도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대책을 마련했다.

 

조선은 같은시기, 그 어떤 전통사회보다 잘 조직된 사회였다. 이는 그 사회의 가용자원을 비교적 효울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의 지배층인 사대부들은 사욕을 억제하고 도덕성을 함양했으며(거인욕 존천리), 이를 바탕으로

조정에 나가 선우후락(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제일 나중에 누린다)의 자세로 백성들을 교화시

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수기치인). 비록 그 뜻을 끝까지 가져간 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이 대의에 토를 달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은 민본을 중시하는 정책을 폈고, 이는 지속적인 세금탕감과 재해가 닥칠때마다 나타나는, 적극

적인 구재노력으로 드러났다. 열악한 재정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한 제도적 개선

으로 나아갔다. 이는 19세기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을 보면 알수 있다. 당시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은 이백만이상이

굶어죽은 아일랜드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이는 신의 뜻이라며 아일랜드인들을 비웃었다.

내외적 위기속에, 조선의 개혁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이런 이데올로기에 철저했던 사대부들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300

년은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투쟁하고 몰락해가는 기간이었으며, 그들의 피와 땀이 이 기간을 풍성하

만들었다.

대기근시기, 조선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텐메이기근(1782

-1788년)을 보면, 그들은 거침없이 사람들을 죽이며 인육을 먹었다. 조선 성리학의 교화정도를 짐작 할수 있다.

또한 기근이 발생하면,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흔한데도, 조선의 경우는 경미했다. 이는 백성들이 지배층

에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그시기에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사대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구 자본주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가는 오늘날, 나침판없이 헤메는 한 민족에게 이시기는 우리들이 찾고 있는 한 파편들

보여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기근>의 저자인 김덕진은 이시기 정쟁이 치열해진 원인의 일단을 대기근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

기근이 하늘의 경고라는 유교관때문에, 신료와 사대부들은 기근이 들때마다 정책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고 이로 인해 정쟁

이 촉발된 면이 있다고 보았다.

 

참고)

1.대기근/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2. 대동법 /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3 레알 뻘짓 블로그(http://blog.naver.com/alsn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