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김광수경제연구소 포럼 http://cafe.daum.net/kseriforum/9Q8k/7493
저자:원성철
2007 년 9 월경 쓴 글입니다.
인성 교육과 지식 교육, 흔히들 교육을 말할 때 많이 애용되는 분류 기준인 것 같습니다. 저는 비슷하긴 하지만 약간 고쳐 말합니다. 인성 교육과 능력 교육이라고요. 누구나 이 두 가지 교육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는 대부분의 과목에서 실제로 중시 되는 것 능력 교육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이 두 가지 교육이 통합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과목(?)은 논술이 유일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다른 과목과 달리 왜 논술은 이 두 가지 교육을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없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생이 좋은 논술 능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성과 능력, 이 두 가지는 논술이라는 새의 양 날개입니다. 어느 한쪽이 없거나 약하면 이 새는 높이 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인문 사회 논술에 관한한 그렇다는 것이 제가 오랜 경험(논술 교육 경험 10년, 대학생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의식화 교육 경험 약 15년)을 통해 나름 깨우친 바입니다.
제가 제 멋대로 규정 하고 있는 인성과 능력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인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① 가치관 - 다 아시는 바 그대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여러 가치 중 어떤 가치를 더 중시하는가?
② 세계관 - 주체 인식과 객체 인식에 의해 결정됨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③ 판단의 재료가 되는 정보와 지식 -흔히 배경 지식이라 함-그리고 이의 선택적 해석력
④ 정보, 지식들을 종합하여 귀납과 연역을 통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위의 4가지 요소들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어 적어도 인문 사회적 소양에 관한한인성의 부족은 능력의 부족을 낳고 능력의 부족은 인성의 부족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상당 정도 성립합니다. 이제 나름 그렇게 보는 이유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좋은 인성의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은 좀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개인의 안녕, 성공만이 아니라 사회의 안녕, 정의 이런 가치들도 소중히 생각 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족한 학생들은 자신 이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의 폭이 좁아지고 필연적으로 ③이 부족해집니다. ③이 부족한 학생은 ④를 해 볼 기회를 많이 가지기 어렵고 따라서 이 능력이 발달하기 어렵습니다. ③ ④가 부족하면 이것은 ②에 영향을 미칩니다. 즉, 주체인식이 부정적으로 됩니다.(자기 능력에 대한 불신, 열등감 등) 이것은 다시 객체 인식을 결정합니다. 여기서 객체인식이라 함은 자신을 제외한 주변 세계 모두를 말합니다. 즉, 객체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사고방식이 생겨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극히 (그것이 아무리 부조리한 현실일지라도 )현실 타협적, 순응적 인간이 됩니다. 예전에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향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한다”고 비웃었던 사람들의 세계관입니다. 난(주체) 계란 넌(객체) 바위 뭐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죠. 순응적 사고에서 비판의식이 나올 리 없고 비판의식 없이 좋은 논술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주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그 현실이 부조리 할 경우)현실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비판, 저항 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옛 날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80년대 미래의 기득권이 확실히 보장된 메이저 캠과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던 마이너 캠 학생들 중 어느 쪽에 운동권이 많았을까요? 답은 메이저 캠입니다.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었던 노동자들은 어땠을까요? 답은 저항은 커녕 아주아주 순종적이었습니다.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이 들을 역사의 주체로 만들기 위해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이 들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부당한 현실을 강요하는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지금 식으로 말하면 ③이 부족하다고 본거죠) 지식을 넣어주기 위해 무던 애를 썼습니다. 결과는 거의 무성과 . 지식을 아무리 넣어주려 해도 아예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더구나 스스로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④)이나 저항 의지는 전혀 생기지 않더라구요.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빈곤과 그에 따른 저학력으로 주체 인식이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객체(현실)를 자신의 힘으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을요. 당연히 비판의식도 생기지 않습니다.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주체인식을 변화 시키는 것을 선결과제로 삼았습니다.(구체적 방법은 말하지 않겠음) 효과는.... 녜 ... 끝내줬죠. 주체인식의 변화는 객체 인식을 변화시키고(현실은 바위가 아니다. 만일 바위라면 나(또는 우리)는 정이다.) 이러한 인식변화는 객체 변화를 위한 진정한 현실 탐구로 나아갑니다. 현실이란 수천 년 인간 역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현실이 전체 사례인양 생각하고 판단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역사 공부에 목말라 했습니다. 역사공부는 이 들에게 ③ ④를 풍부하게 해 주었고 그것은 결국 사회를 변화 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삶이 변화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가능케 했고 이것은 다시 ①과 ②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 시킵니다. 저는 이들이 만일 지금 논술 시험을 본다면 모두 합격권 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체 인식의 중요성에 대해 참 길게 말했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인식에 대해 아직도 남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것은 긍정적 주체 인식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근대 이성주의자들의 주체인식입니다. 이들은 이성을 소유한 자신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나갔군요.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연과 사회, 그리고 대중들을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주관적 해석에 따르면 이 같은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소위 운동 출세주의자들이 되기 쉽습니다.
전혀 다른 형태의 긍정적 주체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 사랑하는 나의 나여 ” 평화 시장 노동자들을 자신과 구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자아의 확장, 또는 확장된 자아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체 인식을 가진 사람은 필연적으로 연대의식을 가지게 되고 사회적, 역사적 연대를 통해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해방된 조국의 문지기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던 김구 선생님과 같은 분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제 위에서 말한 4가지 요소가 실제 논술 작성 과정에서 어떤 작용을 하여,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저의 학생 지도 경험이 반영된 가상의 상황을 가정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래문제는 유명한 건대 기출문제입니다.
2000대입] 건국대 논술고사 문제
<문제>
글 (가)속의 토끼가 인간이라고 하는 가정하에, 글 (가)와 (나)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비교 분석하고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제시문>
(가) 한 옛날 깊고 깊은 산 속에 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토끼 한 마리 살고 있는 그것은 일곱 가지 색으로 꾸며진 꽃 같은 집이었습니다. 토끼는 그 벽이 흰 대리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나갈 구멍이라고 없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게 땅 속 깊이에 쿡 박혀 든 그 속으로 바위들이 어떻게 그리 묘하게 엇갈렸는지 용히 한 줄로 틈이 뚫어져 거기로 흘러든 가느다란 햇살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것처럼 방안에다 찬란한 스펙트럼의 여울을 쳐놓았던 것입니다. 도무지 불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일곱 가지 무지개 색밖에 거기에는 없었으니까요.
그러던 그가 그 일곱 가지 고운 빛이 실은 천장 가까이에 있는 창문 같은 데로 흘러든 것이라는 것을 겨우 깨닫기는 자기도 모르게 어딘지 몸이 간지러워지는 것 같으면서 그저 까닭 모르게 무엇이 그립고 아쉬워만 지는 시절에 들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깊은 땅 속에도 사춘기는 찾아온 것이었고, 밖으로 향했던 그의 마음이 내면으로 돌이켜진 것입니다.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운 빛을 흘러들게 하는 저 바깥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의 개안(開眼)이라고 할까, 혁명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그렇게 탐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던 그 돌집이 그로부터 갑자기 보잘것없는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올빼미가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략)
생일날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창으로 나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상천외의 착안을 끝내 해낸 것입니까. 거기로 흘러드는 빛이 없이는 이 무지개 색의 집도, 저 바깥 세계가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암벽보다 더 철석같아서 오히려 무(無)처럼 보이는 그 창구멍으로 기어 나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마침내 해냈다는 것은, 저 지상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 공기를 마시지 않고는 한시도 살 수 없으면서 그 공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 발견이라기보다 발명을 해낸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손만 가져갔어도 세계는 새까맣게 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열(熱)은 물러갔습니다. 그는 창으로 기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다가 넓어진 데도 있었지만 벌레처럼 뱃가죽으로 기면서 비비고 나가야 했습니다. 살은 터지고 흰 토끼는 빨갛게 피투성이였습니다. 그 모양을 멀리서 보면 마치 숨통을 꾸룩꾸룩 기어오르는 객혈(喀血) 같았을 것입니다.
(중략)
드디어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습니다.
이제 저 바위틈으로 얼굴을 내밀면 그 일곱 가지 색 속에 소리의 리듬이 춤추는 흥겨운 바깥 세계는 그에게 현란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전율하는 생명의 고동에 온몸을 맡기면서 그는 가다듬었던 목을 바위 틈 사이로 쑥 내밀며 최초의 일별(一瞥)을 바깥세계로 던졌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쿡! 십 년을 두고 벼르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홍두깨가 눈알을 찌르는 것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얼마 후, 정신을 돌린 그 토끼의 눈망울에는 이미 아무 것도 비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소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일곱 가지 색으로 살아온 그의 눈은 자연의 태양 광선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토끼는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 되는 그 문을 그러다가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고향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거죽에 나타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 장용학, <요한 시집> 중에서
(나) 오클랜드 섬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금문교에는 17개의 통행료 징수대가 있다. 나는 지금까지 수천 번도 넘게 그 징수대들을 통과했지만 어떤 직원과도 기억에 남을 만한 가치 있는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 그냥 날마다 기계적으로 돈을 내고 받고 지나갔을 뿐이다.
1984년 어느 날 아침,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점심 약속 때문에 다리를 건너기 위해 통행료 징수대들 중 하나로 차를 몰고 다가갔다. 그때 내 귀에 큰 음악 소리가 들렸다. 마치 파티석상에서 울려 퍼지는 댄스 뮤직이거나 마이클 잭슨이 콘서트라도 열고 있는 것 같은 요란한 음악이었다. 나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 문이 열려있는 차는 한 대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차에서 들려오는 사운드트랙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통행료 징수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한 남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그가 말했다.
"난 지금 파티를 열고 있소."
나는 다른 징수대들을 둘러보았지만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몸을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왜 가만히 있지요?"
"그들은 초대받지 않았수다."
(중략)
몇 달 뒤 나는 그 친구를 다시 발견했다. 그는 통행료 징수대 안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아직도 혼자서 파티중이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요?"
그가 말했다.
"당신 지난번에도 똑같은 걸 물었던 사람 아니오? 기억이 나는구먼. 난 아직도 춤을 추고 있소. 똑같은 파티를 계속 열고 있는 중이라니까."
(중략)
당신과 내가 사흘도 지겨워서 못 견딜 그런 좁은 공간 안에서 이 사람은 파티를 열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과 나는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직업을 따분하게 평가하는 걸 난 이해할 수 없소. 난 혼자만 쓸 수 있는 사무실을 갖고 있는 셈이고, 또한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소. 그곳에선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버클리의 아름다운 산들을 다 구경할 수 있소. 미국 서부의 휴가객 절반이 그곳을 구경하러 해마다 몰려오지 않소. 그러니 난 얼마나 행운이오. 날마다 어슬렁거리며 걸어와서는 월급까지 받으며 춤 연습을 하면 되거든요."
- 캔필드·한센,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중에서
여기 두 학생이 있습니다. 한 학생은 개인의 안녕과 같은 개인적 가치만을 중시하고 다른 학생은 사회의 안녕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더불어 중시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중 개인적 가치만을 중시하는 학생이라면 징수원의 태도와 토끼의 태도 가운데 징수원의 태도를 더 바람직한 태도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실제로 처음 논술을 배우러 온 학생에게 이 문제를 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그런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관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교육의 필연적 귀결로서 개인의 안녕, 성공과 같은 개인적 가치를 넘어서는 그 어떤 가치관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 왜냐하면 일단 결과적으로 비참해진 토끼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①의 작용) 게다가 토끼가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 세속적 출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는데 그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와 닿지가 않습니다.( ①의 결과 개인적 가치 이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③의 부족이 생김)
따라서 썩 내키지는 않지만 징수원의 삶의 태도를 안빈낙도 정도로 해석하고( ③의 작용 ) 이를 선택합니다. 썩 내키지 않은 이유는 풍요롭지 못한 징수원이 삶이 영 마음에 들지를 않습니다.(①의 작용) 이제 근거를 제시해야합니다. 아주 잘 제시 한다 해도 이정도 이겠군요. “그러한 태도는 나날의 삶을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일단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따라서 정신적으로)행복하게 해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예컨대 그는 징수대에서 익힌 춤 솜씨를 활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쩐지 공허하군요. 사고의 폭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의 삶의 태도와 사회,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 ③ ④의 부족 )
이제 두 번째 학생, 사회적 안녕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학생의 사고 과정을 더듬어 봅시다. 이런 학생이라면 우선 징수원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파악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회가 안녕하지 못하다면, 예를 일제시대 라면(③의 작용) 이러한 환경 순응적 태도(③중 해석력이 작용)는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영속 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④의 작용) 다시 말해 ①의 결과 사회와 역사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③이 많아(높아)지고 그 결과가 다시 ④를 발달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최종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높은 이상을 추구했던(③의 작용) 결과 토끼가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 지점에서 ②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근대 이성주의자와 같은 주체관을 가진 학생이라면 토끼는 여기서 좌절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더 앞으로 나아가는 진취성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확장된 자아로서의 주체관을 가진 학생이라면 어떻게 토끼의 삶을 지지 할까요? 아마도 개인의 패배가 집단의 패배는 아니며 현재적 패배가 곧 역사적 패배는 아니라는 주장을 펼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고매한 이상을 가진 개인, 또는 집단의 현재적 패배는 그 것이 밑거름이 되어 역사적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논거로 광주항쟁 당시 도청을 사수 했던 시민군의 예를 들 것입니다.(③의 작용) “첨단 중화기로 무장한 정예 국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할 것으로 믿고 도청을 사수하려 했던 이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불의한 현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에 그 들은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비참하게 패배했다. 그러나 광주의 패배는 80년 내내 민주화의 불꽃으로 부활했고 마침내 6.10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④의 작용)고 말입니다.
어느 누구의 글에 가장 점수를 주고 싶습니까?
이제 한국 사회를 말하고 싶습니다.
도덕적 결함이 평범 이상인 어떤 대통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99.9%입니다. 그를 지지하는 국민이 5-60%를 넘나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 때문이라나요. 도덕이라는 가치와 경제라는 가치 중 경제 가치를 우위에 놓는 국민이 그 정도로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저소득, 저학력 층에서 이 사람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되면 가장 먼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니 말입니다. “이미 최악인데 지금 보다 더 나빠질게 무에 있겠냐?”라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저의 대답은 꼭 그렇지 만도 않을 껄요. 더 나빠질 껄요. 왜냐하면.....
누구나 인정하듯 오늘 한국사회의 핵심문제는 양극화입니다. 특히 20대의 경우는 88만원 세대가 고발하고 있듯 이미 그 정도가 폭발의 임계치를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터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부모의 지원과 20대의 비판의식 결여, 현실 순응성이 결합된 결과라고 저는 봅니다. ) 이러한 양극화의 원인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97년 경제 위기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된 신자유주의 논리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는 원조 신자유국인 영미보다 더 근본주의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근본논리에 충실하죠. -승자 독식, 약육강식. 무한 생존 경쟁- 승자에게 영광을! 패자에게 죽음을!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저학력 저소득층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환멸은 이러한 시스템을 만든 정권에 대한 분노라는 점에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선 가능성 99.9%의 후보는 문제 해결의 답이 아닙니다. 그는 노보다도 더욱 더 신자유주의의 근본논리에 충실한 사람이며 게다가 도덕의 가치를 우습게 아는 가치관의 소유자입니다. 먹고 살기도 바뿐데 도덕이 밥 먹여 주냐고요? 예 그렇습니다. 도덕이 밥 먹여 줍니다.
앞서 말한바 있지만 오늘 우리 국민의 다수가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한 생존 경쟁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도덕을 말하는 것을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풍자한 사자 성어가 있죠. ‘송양지인’이던가... 우리 국민 모두는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아니 전쟁터만도 못합니다. 실제 전쟁터에서는 믿고 의지할 아군이라도 있죠. 여기에는 아군도 없습니다. 모두가 적입니다 어디에 도덕이 설 자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사회의 도덕 수준이 낮아지면 그 사회는 그 만큼 더 약육강식 사회가 됩니다. 약육강식 사회야 말로 도덕성이 결여된 강자가 가장 바라마지 않는 사회입니다.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약자들을 마구 뜯어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사회가 되면 사회적 약자인 저학력 저 소득층의 삶은 과연 지금보다 나아질까요? 어떨까요? (인성과 능력 모두가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이와 같은 이치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것이 그들이 자기 배반적 지지를 하는 이유입니다.)
처지가 좀 더 나은 계층인 분들은 어떨까요? 도덕성이 부족한 사회가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도덕성이 결여된 사회는 승자 독식 사회가 되고 이는 과당 경쟁을 낳습니다. 적당한 경쟁은 저비용 고효율을 유도하지만 과당 경쟁은 필연적으로 고비용 저효율 사회를 만듭니다. 제 조카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한 후 이 마트 매장에서 고기 써는 일을 합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일이 아닙니다.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너무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곧 죽어도 정규직이고요 여기 이 일 하는 곳에 취직하려면 최소 전문대 이상 학력 필요합니다. 그것도 빢센 경쟁률 통과해야 하고요. - 그러나 고작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행복 유보하고 그토록 치열한 경쟁을 했더란 말이냐? - 어떻습니까? 이 글 읽고 계신 여러분들은 들인 비용만큼 효율 내고 있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과당 경쟁 사회가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사회 문제가 저출산 문제입니다. 저출산 고령사회가 기업 경쟁력 약화, 국가 경쟁력 약화를 불러 온다는 것은 상식이죠. 어럽쇼! 도덕 별로, 경제 최고라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는 경제가 무너지게 생겼네요. 고비용 저효율 사회, 기업 국가 경쟁력이 약한 사회, 이런 사회의 경제가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갈 수 있을까요? 이처럼 도덕이 결여된 경제는 지속 불가능한 가짜 경제입니다. 가짜 경제 사회가 되면 종국에는 모두에게 재앙이 닥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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