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 볼만한 글들

<검사내전> 김웅 검사의 통찰이 깃들인 곱씹을 글들

정암님 2019. 3. 30. 19:02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고 효과적인 해결책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상대방을 모함하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황당할수록, 근거가 없을수록 더 강력해진다.

논리와 이성의 천적은 부조리가 아니라 욕심이다.

재판정에 나가보면 피해자의 반신불수보다 피고인의 치질이 더 중병 취급을 받는다.

제발 범죄 피해를 당하지 마사라. 피해자도 헌법상 기본권이 보장된 국민이지만 실제로는 2등 국민이다.


감정은 이성에 우선한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도 감정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사기도 상대방의 치밀한 수에 속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당하는 것이다. 일단 오류에 빠지면 사람들은 그 어떠한 사실과 증거에도 결코 그 오류를 수정하지 않는 강한 변화 저항성을 가진다.

흔히 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좀 더 나은 판단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집단 지성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18급 100명이 머리를 짜낸다고 이창호 국수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여럿이 모일수록 그 집단이 빠진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같은 오류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정의와 이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정의를 택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겠지만. 정의와 손해보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 압도적일 것이다.

사기꾼들이 자기 사건에 열성적인 경찰관을 만날 때 사용하는 수법은 두어 가지가 있다. 양아치라면 그를 모함하고, 전문가라면 사건을 이송시켜버린다.


흔히 사람들은 위기가 기회라고 설교한다. 정말 그럴까? 위기가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기를 겪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위기가 진짜 기회라면 위기를 만들어 주는 컨설팅 회사가 있어야 한다. 위기를 극복해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들을 잘 들어보면 사실 위기가 아니었던 경우가 더 많다. 단순한 순환 과정에서의 일시적 부침에 불과한 것을 크나큰 위기였던 것처럼 호들갑 떠는 이유는 자신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포장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은 위기가 아니다. 위기란 대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때로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기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 공정, 평등 같은 이야기들을 다투듯 떠들어댄다. 하지만 약자의 고통이나 불공정에 대해 진정 공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대부분 권력을 쟁취하려는 수단이든지, 대중의 인기를 끌기 위한 선동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결국 권력을 얻더라도 몇 푼 적선하는 것으로 대중을 속인다.

나는 그에게 약자에게 희망을 주라는 말도 사기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식들에게 희망이 아니라 특혜를 준다. 청년에게 위로를 건넨다는 교수나 종교인도 정작 관심은 돈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늘 우직하고 성실한 자들의 시간과 노력과 기대를 훔쳐 가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생소한 분야에 대해 한두 사람이 단정적으로 말하면 당황하게 된다. 그 반작용으로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라도 의심을 거두고 믿게 된다. 하지만 생소한 곳이라고 해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다. 청산가리가 당신이 살던 곳에서 피로회복제가 아니라면 서울시에서든 명왕성에서든 마찬가지다.


판사나 검사들은 자신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반성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시험 성적 좋은 것 외에 그다지 특출할 것 없는 판사나 검사 앞에서 갑자기 개과천선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재판장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이유는 엄중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만에 하나 후회 같은 걸 한다면 그건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잡힌 상황에 대한 후회일 가능성이 높다. 파렴치범들은 다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을 개과천선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백면서생이 꿈꾸는 상황극일 뿐이다.


죄지은 자들의 갱생과 재활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 왜 피해자들에게는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고 분노가 인다. 작금의 한국에서는 피해자들은 그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정의를 외치는 그 많은 단체와 변호사들 중에서 피해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것이 명예나 정치적 입지를 주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무관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마지막 날, 피해자는 "이것도 금새 잊히고 곧 나아지겠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기대와 달리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낮에도 밤에도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고,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우울증이나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 같은 자학을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은 피해자를 파괴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절대 안일하게 대처하지 말고 기관이나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분과 재력에 상관없이 인간의 본색은 대동소이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것은 깃털이 아니라 맹세다.

사람들의 기억은 쉽게 변하고 변한 후에는 고집스럽게 완고하다.


상대에게 내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면, 상대가 지닌 진짜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늘 대의와 도덕을 내세우기 때문에 실제 의도를 알기 어렵다. 툭히 경제적 동기라면 더욱 더...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는 첫 1분 안에 상대방의 의도를 짐작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촉진을 하듯 이 말 저 말 던져보고 그 반응을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그게 스무고개가 아니라 세 고개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 마디 안에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상대방은 금새 마음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인권의식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한국 헌법의 핵심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다. 인간은 왜 자유로워야 하고, 왜 평등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이다. 존엄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이고, 모두가 평등하며,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진정 용서하고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응징 혹은 정당한 처벌을 가하는 것이다. 죄인이 적절하게 징벌되고 나서야 나는 앞으로 움직일 수 있고, 그 모든 일과 작별할 수 있다.(슬라보예 지젝)

'가족을 생각하라'거나 '지금 참고 견디면 내일이 밝을 것이다'같은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은 극한 상황을 겪어보지 않고 늘 여유롭게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던보이의 낙관은 풍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모던보이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견디라는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현실을 잊고 싶어하게 하는 원인이 바로 그 현실과 현실의 연장에 불과한 미래라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 모른다.


욕구와 충동 속에서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우리의 존재는 선택이 결정짓는다. 결국 선택이 자아를 만드는 것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곡선이고 움직인다. 사람이 경직되는 것은 오직 죽었을 때뿐이다. 그래서 직선적 추측은 죽음을 상징한다.


선의가 꼭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물론 부작용은 시차를 두고 발생하기 때문에 정상배들은 늘 선의만 강조한다. 표는 지금 받는 것이고 , 책임은 나중에 지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라도 책임을 지는 정치인은 없다.


답은 되도록 말해주지 않는 것이 좋다. 답이라는 것이 도그마가 될 수도 있고, 정작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꼭 말해야 한다면질문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


인터넷이나 방송은 현실의 일부분만을 고려해 뽑아낸 이미지를 꺼내 들고 왜곡된 사실과 결론을 강요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그런 매체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신이 많은 정보를 축적했다고 착각하기 쉽고, 또 은밀히 강요된 결론을 자신의 이성적 사고의 결과로 오해하기 쉽다. 아는 것도 많고 세상을 보는 눈도 가졌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지루하고 단편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단편적인 사고를 하느라 활용하지 않고 아껴둔 머리는 편가르기를 하거나 누군가를 지독히 미워하는 쪽으로 사용된다.

앨빈 토플러는 세상이 복잡해지고 정보가 폭증하면 그것들을 미처 분석하지 못한 채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정보들만 선택하여 세상을 단순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정보과부하'라고 칭했다. 인터넷은 대표적 정보과부하의 세상이다.

집단지성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것이라고 믿으며 소셜 미디어를 신봉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통제력과 이해력이 떨어질수록 무언가 믿을 구석을 찾아 매달리기 시작한다.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가 그 믿을 구석이 되고 있다. 소셜 미디어는 실제와 달리 뉴스가 선정적이고 획기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거대한 압력을 가하면서 뉴스를 더욱 상품화하였다. 소셜미디어의 투명성은 말뿐이며 본질적으로 구원과는 불화를 이룬다. 사용자들은 피해자가 언제까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기만을 바란다. 이론상 소셜미디어는 대화와 갈등 해결을 장려하나 실제로는 전쟁을 조장한다."(에릭 데젠홀)


모든 현상에는 이면과 원인이 있다. 대개 여러 개의 원인이 경합하며, 그것들이 화학 결합을 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하한다. 그런 까닭에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인터넷 댓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인을 찾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무척 어려운 과학적 추론이 필요하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즉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말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대부분 사람을 무시한다는 반감만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죽었다.


현상을 벗어나 그 뒤에 있는 이면에 대한 인식과 고민을 하게 해주는 것은 다양한 경험이다. 경험은 직접경험과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이 있다.


전문화는 인간이 다양한 범위를 조율하고 검색하는 능력을 차단하고 일반 원리를 더이상 발견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전문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실상 더이상 전문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다양성과 원리를 발견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앞으로 개인과 사회를 공격하는 주요한 범죄는 데이타와 프라이버시 침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인터넷 사용정보 등을 통해 개인정보를 알아낼 뿐만 아니라 온라인 주체성을 조작할 수도 있다. 플랫폼기업은 정부와 야합하고, 정보를 과점하고, 대중에게는 왜곡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정보의 불균형은 자연스레 권력의 불균형으로 이어질 것이다.


껍질은 보호막이지 굴레다.

사람들은 부족함보다 불공정함에 분노를 느낀다.

권력은 자의성에서 나온다. 그래서인지 한국은 그런 불균형과 불공정을 고치려는 시도에 대해 심한 저항이 존재한다.


법의 가장 큰 맹점은 일도양단식 이분법이라는 점이다. 즉 법은 어느 하나만이 옳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 결함을 지닌분쟁 해결방법이다.

한국 형사사법 제도의 문제점은 민사 사건이 형사 사건화되고 그로 인해 고소 사건이 폭증한다는 점이다. 이는  검찰권의 비대와 시민에 대한 국가의 부당한 간섭을 낳을 수 있다. 그렇게 검찰이 커지면 정치인은 그 힘을 사용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고, 검찰을 장악한 권력은 반드시 괴물이 될 것이다.

부도덕과 불법은 다르다. 모든 부도덕을 불법으로 만드는 사회는 결국 전체주의나 신정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

잘살고 못사는 것을 공무원과 정치인의 미덕과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그들의 법질서는 언제까지나 불안할 것이다.(버나드 맨더빌)

"사회는 명백히 원하는 범죄의 양을 스스로 결정한다."라고 로렌스 프리드먼은 말했다. 형사처벌이 많아질수록 즉 범죄의 양이 많아지면 범죄에 둔감해지고 법을 경시하게 된다. 또한 수사기관이나 검찰의 힘이 비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