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소론의 영수 윤증:붕당정치의 파국을 막고 사림의 이상을 지키려 했지만...

정암님 2011. 11. 9. 19:53


윤증 초상화

1680년(숙종 6년) 피바람이 불었다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숱한 남인대신들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갔다.그 이후 신하들은 상대당파를 모두 도륙하지 않고는 베개를 베고 편히 잠들지를 못했다. 피가

피를 부르고 원한이 원한을 낳았다.누가 조정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서로를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못하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었는가? 숙종이다. 원흉은 숙종이었다.


정치판은 이익집단들의 이해관계가 마지막으로 충돌하는 곳이다.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절대군주정에서는 국왕이 결정권자이고 심판이었다.심판은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숙종은 심판임에도 편파적이었다. 또 다혈질인데다 변덕이 심하고 자기애가 강한자였다.

책임자 몇명만 처벌하면 되는데 당파모두를 숙청하고 죽였다.기회를 잡은 상대당은  모략을 꾸며

학살을 더욱 부추겼다.

과거의 정쟁에서는 주동자만이 처벌을 받았다. 처벌도 목숨을 빼앗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귀양정도

였다.원칙이 무너졌다.원칙이 없으니 언제 무슨 이유로 죽을지 아무도 몰랐다.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적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적들이일부라도 살아남는다면 언젠가는 자기자신이 죽을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계속되는 피바람은 최고책임자의 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하며 넘어서는 안될 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내가 선을 지키지 않는데 누가 선을 지키겠는가? 피바람은 더욱 거세게

불었다.

붕당정치가 무너지고 있었다. 사림의 태동사는 훈척(공신),외척과의 투쟁사였다.사림이 권력을 잡은

후 다시는 비대한 부패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사림정치의 얼개를 만들었다. 공론정치와

왕과 재상에 대한 견제장치가 핵심이었다.

유림의 여론(공론)을 존중하고, 당하관인 이조전랑이 감찰,언론이 주임무인 삼사의 관원천거권을 가짐

으로서 삼사의 독립성을 보장했다.인사권이 없는 당상관들은 삼사관헌들에게 압력을 줄수 없었다.그럼

으로써 당상관들을 견제할수있다는 것이다.선조이후 붕당이 형성되면서 붕당들은 상대당의 공격을 대비

하고 유림의 지지를 얻기위해 자기규제를 강화하고 공론에 입각한 정치를 펼칠려고 노력했다.이것이

무너지려 하고있었다.

남인축출은 서인이면서 외척이었던 김석주의 공이 컸다.김석주는 남인잔존세력을 마저 도륙하기위해

역모사건을 날조했으나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서인의 중진들은 이사건을 덮으려 했지만 소장파들은

분노했다. 더러운 음모와 야합..이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서인은 두파로 갈렸고 조정은 어지러웠다.

1682년(숙종8년) 윤증은 숙종의 부름을 받고 과천으로 올라왔다.조정의 당면현안을 해결해 달라는 숙종의

부탁을 받고나서였다.송시열도 올라와 있었다. 송시열은 서인정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사건을 덮는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진들을 지지했다.반면 윤증은 출사를 위한 3대명분론을 내세웠다.

첫째 공작정치에 희생된 남인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정치화합을 이룰수 있겠는가?

둘째 정치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외척들을 축출할수 있겠는가?

셋째 집권 서인들이 자파출신만 등용하고 남인들은 배척하는데 이를 시정할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시의 정세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조건이었다. 윤증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서인은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과 윤증,박세채를 추종하는 소론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남인은 왕권을 높이고, 왕의 힘을 빌려 권력을 확장하려 하였다. 노론은 노론 일당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소론은  외척과 왕권을 견제하여 사림의 본령을 지키려 하였다.정책상으로는 현실을 중시하였고

타정파와의 공존을 통해 붕당정치의 복원을 꿈꾸었다.그러나 정쟁의 소용돌이는 더욱 커져갔고 최후의

승자는 노론이었다.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재기한 남인들은 다시 몰락했다. 장희빈에게는 아들이 있었다.세자였다.

노론은 세자를 적대시하고 연잉군을 옹립하려 하였다.어머니를 잃은 세자가 언제 칼을 휘두를지 몰랐기

때문이다.소론은 세자를 옹호했다.적장자인데다 세자의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경종이다. 노론은 불안했다.그들은 경종를 압박해 연잉군의 세제임명,대리청정을

강요했다. 노론의 거듭된 무리수에 유림의 공론이 소론에게 기울었다.소론이 반격에 나섰다.목호룡의 고변을

시작으로 노론에 대한 피바람이 일었다.많은 노론대신들이 처형당하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재위 4년만에 경종이 죽었다.연잉군이 왕위에 올랐다.영조다.

천우신조인가...

노론은 목숨을 바쳐 영조를 지켰다며 지분을 요구했다.소론에 대한 숙청과 노론일당체제를 요구한 것이다.

영조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재위3년(1727년) 그는 노론강경파를 몰아내고 소론온건파에게 조정을 맡

겼다. 이때 소론강경파와 남인강경파는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런데 동조세력인 소론온건파가 떨어져

나간것이다. 거사계획도 소론온건파를 통해 누설되었다.그들은 황급히 반란을 일으켰다.1728년 이인좌의

난이다.한때는 청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올렸으나 안성전투에서 대패하고 몰락하고 말았다.소론온건파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공을 세웠지만 이는 소론세력의 몰락을 가져왔다.

1755년(영조31년) 나주괘서사건이 터졌다.영조의 완론탕평은 소론강경파들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영조는 그의 적들에게는 매우 냉혹하고 잔인한 자였다. 그는 이사건을 계기로 살아남은 소론 강경파는 물론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소론온건파마저 모조리 숙청했다.소론 온건파들은 땅을 쳤지만 할수있는일은

없었다.이후 소론은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일제에 나라를 잃었던 시기 노론대신들은 앞다투어 매국노가 되거나 침묵을 지켰다.향촌에 은거했던 소론계

와 남인계들이 그 길고 험난한 길에 나섰다.해방후 조국은 그들을 냉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