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답사/문화재 심층분석과 관찰포인트

석굴암(석불사), 그오욕의 역사 1편: 약탈

정암님 2012. 7. 6. 07:09

석굴암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석굴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것은 1907년무렵이었다.1905년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땅에 도굴을 조장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무수한 고려청자를 일

본천황과 일본귀족들에게 선물했다. 그로인해 고려시대 고분이란 고분은 모조리 도굴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원래 조선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을 중벌로 다스렸다.그래서 무덤을 도굴한다는 것은 상

상할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일인들이 앞장서서 도굴하고,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성한 무

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1907년 곳곳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산사의 승려들은 불안감으로 산에서 내려가 빈절로 남아있는 절

집이 많아졌다. 이틈을 타 도굴꾼들이 사찰문화재를 마구 약탈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토함산

높은 산중에 있는 석불사 석굴이 세상에 늦게 알려진것은 차라리 천운이었다.

1902년 시행된 일제의 고건축실태조사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석굴은 한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석굴이 알려지자 드디어 도굴꾼들이 이 높고 험한 산중까지 들이닥쳤다.

도굴꾼들은 석굴내 감실에 안치된 불상중 두개(아마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을 것이다)를 훔쳐갔다. 이때

이들은 혹시 본존불밑바닥에 복장유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본존불 궁둥이부분을 무참하게 정으

로 깨뜨렸다. 그때 깨진 파편은 땅에 묻혔다가 후일 보수공사때 다시 붙였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모두 40개의 석굴조상은 두개를 잃어버려 38개만 남아있다.

1909년 2대통감으로 소네 아라스께가 부임하였다. 그 또한 엄청난 문화재약탈자였다. 그는 주로 불교미

술품과 고문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년도 못되는 통감재임시에 고가,사찰,서원에 소장된 고문헌을 무

더기로 갈취하여 황실에 헌납했다. 또 석굴안 11면관음보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석탑을 가져

갔다. 본래 석굴은 인도의 석굴사원에서 기원한것이므로 본존불 앞뒤에 소탑 한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

본존불뒤의 소탑은 소네가 훔쳐가고 앞쪽 소탑은 부서진 파편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지

금 석굴안에는 석탑받침돌만이 쓸쓸히 그  자취을 말해주고 있다.


참조)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 저

2.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김봉렬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