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석굴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것은 1907년무렵이었다.1905년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땅에 도굴을 조장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무수한 고려청자를 일
본천황과 일본귀족들에게 선물했다. 그로인해 고려시대 고분이란 고분은 모조리 도굴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원래 조선은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을 중벌로 다스렸다.그래서 무덤을 도굴한다는 것은 상
상할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일인들이 앞장서서 도굴하고,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성한 무
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1907년 곳곳에서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산사의 승려들은 불안감으로 산에서 내려가 빈절로 남아있는 절
집이 많아졌다. 이틈을 타 도굴꾼들이 사찰문화재를 마구 약탈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토함산
높은 산중에 있는 석불사 석굴이 세상에 늦게 알려진것은 차라리 천운이었다.
1902년 시행된 일제의 고건축실태조사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석굴은 한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석굴이 알려지자 드디어 도굴꾼들이 이 높고 험한 산중까지 들이닥쳤다.
도굴꾼들은 석굴내 감실에 안치된 불상중 두개(아마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을 것이다)를 훔쳐갔다. 이때
이들은 혹시 본존불밑바닥에 복장유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본존불 궁둥이부분을 무참하게 정으
로 깨뜨렸다. 그때 깨진 파편은 땅에 묻혔다가 후일 보수공사때 다시 붙였지만 그 흔적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모두 40개의 석굴조상은 두개를 잃어버려 38개만 남아있다.
1909년 2대통감으로 소네 아라스께가 부임하였다. 그 또한 엄청난 문화재약탈자였다. 그는 주로 불교미
술품과 고문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년도 못되는 통감재임시에 고가,사찰,서원에 소장된 고문헌을 무
더기로 갈취하여 황실에 헌납했다. 또 석굴안 11면관음보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석탑을 가져
갔다. 본래 석굴은 인도의 석굴사원에서 기원한것이므로 본존불 앞뒤에 소탑 한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
나 본존불뒤의 소탑은 소네가 훔쳐가고 앞쪽 소탑은 부서진 파편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지
금 석굴안에는 석탑받침돌만이 쓸쓸히 그 자취을 말해주고 있다.
참조)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 저
2.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김봉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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