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사

[스크랩] 종로경찰서를 폭파하라

정암님 2007. 9. 1. 00:00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의 성지를 찾아서...

제1편) 종로-종로경찰서를 폭파하라

          1920년대 의열투쟁의 신화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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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에 서있는 김상옥의사의 동상

1919년 3.1만세운동의 실패로 항일운동이 침체되고 일제가 한반도의 완전식민지화를 자신하던 1923년 1월 12일 오후8시경,

일제경찰정치의 상징이며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체포,고문했던 악명높은 종로경찰서의 서편유리창을 깨고  폭탄이 날아들었다.

폭탄은 광음을 내며 터지면서 일경과 매일신문기자등 10여명이 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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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각역3번출구앞에 있는 기념석

경악한 일경은 전경찰력을 동원 범인이 의열단원 김상옥이란것을 알고, 형사대15명을 파견하여 매부 고형근의 집에

은신해있는 김상옥을  덥쳤다.그러나  김상옥은 이미 기미를 눈치채고 대기하고 있다가 일경이 방문을 낚아채자 먼저 기습하여

종로서 형사부장 다무라를 사살하고 수명을 부상시킨후 남산으로 도주한다

일제는 군병력까지 지원받아 천여명으로 남산을 이잡듯이 뒤졌지만 김상옥은 승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포위망을 빠져나가  여자동지인 이혜수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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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경찰서자리에는 장안빌딩이 들어서 있다 여기는 해방후 장안파공산당의 본부가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또다시 은신처가 일경에게 포착되고 만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 마야의 지휘하에 1000여명을 동원 4중포위망을 구축하고 항복을 권유한다

하지만 김상옥의사는  이를 거부하고 쌍권총을 든채 5채가옥의 지붕을 넘나들며 3시간동안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다

일찌기 의사는 상해를  떠나올때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사가 이번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않겠소"

적을 16명이나 중상을 입혔지만 의사도 온몸에 10여발의 총탄을 맞았다 이제 남은 총알은 1발..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김상옥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자기머리에 방아쇠를 당겼다.하얀눈발에 붉은 피를 적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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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5가효제동에 있는 김상옥길 --김상옥은 효제동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듬해 한식 날. 어머니 김점순 여사는 아들의 허름한 무덤 앞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에그, 왜 왔더냐! 죽으러 왜 왔더냐! 거기(상하이)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왜 와서 영이별이 되었느냐!”
이틀 뒤인 1924년 4월 8일 동아일보 2면에는 이 한 많은 모정(母情)이 김상옥 의사(義士)의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죽으러 왜 왔더냐/묘전(墓前)에서 통곡하는 김상옥의 친모’라는 제목의 그 기사 끝 문장은 김 의사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묻고 있다.

“아! 가슴에 품은 그 뜻은 어디 두고 이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누웠느뇨.”
일제는 ‘범죄를 선동한다’며 이 기사를 즉각 삭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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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옥사건을 호외로 보도한 조선일보사 건물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효제동 김상옥거리











 




             








 


 





 



 

출처 : 나의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정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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