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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한말 역사속의 덕수궁(=경운궁)

정암님 2007. 9. 1. 00:02

덕수궁돌담길로 세인에게 낭만의 상징으로 알려진곳..덕수궁.. 그러나 실제로는 구한말 국권침탈의 현장으로서 민족의 애환과 분노가 서린곳이다 힘없이 쓰러져간 대한제국과 고종 ..그들과 얽힌 덕수궁의 이야기를 해보자

1.대한제국의 성립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도주한다 (아관파천)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많은 이권을 요구하고 여기에 열강이 가세하여 이권침탈이 극에 달한다 분노한 서재필,윤치호,이완용등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열강의 이권침탈에 맞서고 입헌군주제를 주장한다 이에 위기위식을 느낀 고종은 땅에 떨어진 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에 취임하여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주변정세도 청은 전쟁에 패해 발언권이 없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서로 견제하여 방해하는 세력이 없었다

2.덕수궁으로 환궁하다

신변의 불안감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던 고종은 주변에 외국공관이 밀집해 있고 상대적으로 면적이 적어 소수병력으로도 경호를 할수 있는 덕수궁을 선택한다 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러시아공사관까지 지하통로를 만들어 둔다

3.광무개혁

광무개혁의 모토는 구본신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권을 더욱 강화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을 진흥하고 지계를 발급하여  근대적토지소유권제도를 확립하려 하였다

4.덕수궁-다른 궁들과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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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궁들은 남쪽문이 정문이다 하지만 덕수궁은 동쪽문인 대한문이 정문이다

-덕수궁도 원래는 남문이 정문이었으나 남문과 정전사이에 많은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동문쪽에 개설되어 사람들이 동문으로 다니면서 동문이 정문이 되었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돌난간에 용이 새겨진 것은 덕수궁뿐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석어당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난후에 대궐이 불타버리고 거처할곳이 없었던 선조는 이곳을 행궁으로 삼는다 원래 궁은 단청을 해야하는데 임난후라 재정도 없었고 백성들의 시선도 의식해야 했다 그래서 단청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때 인목대비가 유폐된 곳이다(서궁)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정관헌

덕수궁은 한국식과 서양식건물이 혼재된곳이다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이 정관헌과 석조전이다

석조전은 현재 보수공사중이다 고종이 다과를 들며 쉬거나 연회장소로 사용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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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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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헌테라스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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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헌기둥장식

출처 : 나의 문화유산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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