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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그빛과 그림자

정암님 2009. 1. 27. 18:12

조선중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시대의 최대화두는 부패척결이었다

권력을 움켜진 훈구파들은 토지겸병과 확장에 열을 올렸고,백성들은 방납과 군역에 시달리며

극한으로 몰렸다 많은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였고 도적들이 도처에 출몰했다

조야에 위기의식이 팽배하였고 일단의 세력이 나타났다

역사는 이들을 사림파라 불렀고 그중심에 조광조가 있었다

 

                                                조광조 영정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자를 군자 혹은 성인이라 부른다 모든사람이 군자가 된다면 지상이 하늘이 된다 

그러기위해서는 지배층의 개인수양과 도덕적 실천이 중시되어야 한다 이들이 조정에 나아가 위로는

계몽된 군왕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교화한다면 성리학적이상국가를 만들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무리들로 득실거렸다 영혼없는 자들이었다

어떻게 해야할것인가

먼저 왕에 대한 교육과 정책토론이 강화되었다(경연강화) 현량과를 설치하여 우수한 인재들을 불러들이고

언로를 개방하여 훈구파의 부패를 공격했다

 

                                         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성리학은 과거시험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과거시험공부를 위주로 하는 관학교육은 불신했다 

자기수양이 안된자들이 요직을 맡음으로서 부패가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사학운동을 지지했다 이것이 서원설립붐으로 연결되면서  지지세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사림은 국가가 부유하고 백성이 가난한것보다는 백성이 부유하고 국가가 가난한 나라를 주장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방납의 폐지를 주장하였고,내수사의 고리채를 혁파했고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하는 한전제와 균전제의 실시를 주장하여 대토지소유자들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조광조가 숨을 거두었던 자리 그날 흰눈이 끝없이 내렸다 

1519년11월 사림은 안밖으로 지지세력을 보강하고 백성들의 신망을 업은뒤, 훈구파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위훈삭제사건이다 중종반정으로 공신록에 오른자가 117명이었다 이중 상당수가 반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공신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좀먹고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그들은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들이었다

사림은 섬기던 군주를 죽음으로 내몬 것을 공로라 생각하고 어떻게 공신의 지위를 향유할수 있느냐고 공격했다

결국 76명이 공신록에서 삭제됐다 70%가 넘는 비율이다 이날 중종의 안색은 어두웠다

3일후였다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 조광조를위시한 사림파는 파당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숙청되었다(기묘사화)

조광조는 화순군 능주면으로 유배령이 떨어졌다 한달뒤 그는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향년38세다

그날 흰눈이 끝었이 내렸다

 

                            용인에 있는 조광조 묘 

역사기록을 보면 성리학은 고려말 안향이 들여오고 조선건국의 이념이된다

그런데 왜 이때 사림은 다시 성리학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을까 그럼 그이전의 성리학은 어떤 의미였을까

9대임금 성종은 과부재가금지법을 밀어부친다 그런데 이때 중신회의에 참석했던 대신45명중 42명이

반대했다 조선중기때만 해도 여자들의 지위는 낮지 않았다

남편은 처가살이를 하면서 아내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재산상속과 제사를 모시는데 남녀간에 차별이 없었다

과부의 재가,남녀의 접촉과 외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호주제도 인정되었다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반불교적이다 고려의 불교이데올로기에 대항하기위해서 정치적으로 수용했을뿐이다 성리학적 윤리규범을 보급시키기위해,  왕실이 적극적으로 강권했지만 사대부들조차 소극적이었다

하물며 일반백성사이에서야 어떠하겠는가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심곡서원

이때 사림이 성리학근본주의 운동을 펼친다  그들은 위로는 수기치인을 통해 탐욕을 억제하고, 사림정치체계를

구축하여 부패를 억제한다 아래로는 백성에 대한 교화를 강화하여 향약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향촌사회에

성리학적 윤리질서를 강요한다 이것이 유교윤리가 고착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후 양란을 거치면서

특권화 된 양반계급은 윤리질서를 더욱 신성시하여,백성들의 저항을 억누르게 된다

이 유교윤리규범이 오늘날까지 미풍양속이란 이름아래 우리주변에 남아있는 것이다

 

                                 심곡서원옆에 있는 수령500년 된 나무들

권력을 독점하는 자없이 평등하며,재화는 공유되고 생활은 보장되며,각 개인이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수 있고

범죄도 없는세상을 조광조는 꿈꾸었다 이것이 유교적 이상사회인 대동세계,요순시대인 것이다

조광조는 한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비장하게 쓰러져 갔다

그후 조선팔도에서 사림의 추종자들은 게속 늘어갔고 마침내 선조초기 조정을 장악한다

조광조는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유가의 최대 영예인 문묘에 배향되며,사림의 중조로 높이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사림의 사대모화사상,비현실적인 명분론 ,가부장적 질서에의한 남존여비사상등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은 조광조의 그림자였다

그러부터 70년후 임진왜란이 터졌다 전쟁사에서 이례적으로 많은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웠다

만일 사림파의 개혁이 없었다면 ,그들이 자기혁신을 통해 향촌의 지배력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조선역사에서

의병운동을 볼수 있었을까... 이것은 조광조의 빛이었다

 

역사는 모순에 처했을 때,혁명과 개혁의 갈림길에 선다

조광조는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개혁에 설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의 필연적인 한계다

개혁이란 무엇인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정책을 바꾼다고 무조건 개혁이라고

우기는 정상배들도 있지만 말이다 그럼으로서 수혜자가 줄어드는데 그것이 무슨 개혁이란 말인가..

개혁에는 기득권층의 물질적 양보와 정신적 양보가 있다  훈구파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지만,

사림파는 자기억제와 절제를 통해 고통분담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문화를 만들고

비록 지배자의 입장이지만 백성들을 보살피는 자세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