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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 답사기 2편) 백석동천,홍제천의 비극,화냥년...

정암님 2012. 6. 6. 05:48

유홍준은 강진,해남을 주저없이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다. 언제나  역사의 변방이어서 대단한 유적,

유물이 있을지 만무하지만, 거기에는 붉은 황토빛이, 시푸른 바닷물이,짙은 녹색의 논밭이 있었다.

또 그속에는 살아간 선조들과 살아온 자들의 체취가 강렬하게 남아있았디.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서울에서 그런 곳은 어디일까? 나는 주저없이 서울의 답사1번지로 부암동을 꼽겠다.

급속한 도시화로 대부분의 지역이 예전모습을 잃었지만,부암동은 아직도 그모습을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이는 근처에 청와대가 있어서 이지역이 오랫동안 개발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화려한 별서들과 페허가 된 정사들,돌구비 하나하나에 얽힌 살아간 자들의 아픈 이야기들이 있다.

흔히들 경복궁을 서울의 얼굴로 생각하지만, 소수를 위한 인공물이 상징하는것이 얼마나 될까?

부암동 백사실계곡은 명승 36호로 지정될 정도로 수려하다. 또한 1급수지표종인 도롱뇽이 서식

할 정도로 물도 맑다. 백사실계곡을 가다보면 바위에 백석동천이라고 써진 각자를 볼수있다.

 

조선은 적극적인 사산금표(四山禁標)정책을 통해 도성주위의 산들을 보호했다.그결과  북악산.

인왕산,남산의 계곡은 빼어난 풍광과 수려한 경치를 갖춘 곳으로 자리잡아 권문세가의 별장이

즐비하였고,도성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이곳 역시 흰돌이 많고 경치가 좋아 백사실,백사

골,백석동,백석실로 불렸다. 계속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한쪽은 백석동천으로 다른쪽은

약수터로 가는길이다.약수터로 가는길도 호적하고 운치가 있어 걸어볼만한 길이다.

 

백석동천에는 페허가 된 세도가의 별장터가 있다. 별장은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를, 낮은 곳에

연못과 정자를 두었다.사랑채자리에는 돌계단과 초석이 잘 남아있고 그 뒷쪽에 안채의 흔적이 있다.

 

아랫쪽에는 연못과  육각정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국전쟁때 정자가 소실되었다 한다.

 

 

 

계곡의 실개천을 따라 내려가면, 강원도 산간마을같은 뒷골마을이 나온다.뒷골마을을 타고 내려가면

홍제천과 마주친다.

 

         바위를 타고 뒷골마을사이를 지나간다

       하얀,  넓적한 바위가 도처에 가득한 홍제천

 

홍제천을 보면 유난히 희고 넓적한 바위들이 많다. 도시화이전, 이곳이 얼마나 깊은 골짜기였는지를

알수 있다. 그때는 개울도 맑고 깨끗했으나 지금 홍제천변을 거닐면,천변은 잘 가꾸어졌지만 냇물

에는 녹조가 떠 있고 악취가 심하다.산도 옛산이 아닌데 물이 옛물이길 바라는 것은 과욕인가...  

홍제천은 가슴아픈 사연을 안고 있었다. 병자호란때 청군은 많은 조선인들을 끌고 갔다. 몸값을 받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가 수만명에 달했다. 어렵게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중에는 사족부녀자들도 많

았다. 하지만 정조을 잃은 그들을 사족집안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이것이 사회문제화하자 인조는 홍

제천에 몸을 씻으면 그녀들의 정조를 문제삼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이를 어기면 엄단하겠다고 말했지만

사대부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들은 성밖에서 몰려 살면서 구걸과 매춘으로 연명하다

굶어죽고,얼어죽고,맞아 죽어갔다. 그들이 실절한것이 그녀들의 책임이 아니건만,한조각 그리움을 안고

돌아왔건만 이땅이 그녀들에게 준것은 냉대와 차가운 시신을 묻을 조그만 땅덩어리 뿐이었다.

죽은후에도 그녀들에 대한 냉대는 게속되었다. 환향녀가 음란한 여자의 대명사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화냥년이란 비속어로 우리주변에 남아있다. 강자에게 비굴하고 자국민은 천대하는 습성이 과연 현재의 

이나라에 없다고 누가 자신할수 있겠는가.. 

              세검정

세검정은 이귀,김류등이 광해군의 페위를 의논하면서, 칼을 물에 씻어 거사결의를 다짐했던 곳이라

하는데,옛건물은 소실되고 1977년 복원한 건물이다.정자는 건물자체가 아니라 주변의 경관이 중요

한데,작금의 세검정주위는 오폐수가 흐르는 홍제천과 바로 옆의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가 뿜어대는

매연때문에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더구나 우범지대화를 우려해서인지 출입마저 막아 흉물

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곳은 차라리 복원하지 말고 표지석만 세워두었다면, 우리에게 세검정은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역대왕들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이곳 개울에서 사초를 씻는 세초작업을 했다. 당시 사초지는 물로

씻으면 먹글씨만 지워져 재활용을 할수 있었다 한다. 또 사초로 인한 옥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

었다.세검정근처는 경치가 아름다워 연산군이 탕춘대를 세웠던 터가 있다.

 

세검정에서 북악터널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세검정초등학교가 있다.그 학교 운동장에 보물 235호인

장의사지 당간지주가 서 있다.장의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것으로 추정되며,조선초기에도 왕실제사

와 기우제를 정기적으로 지낼정도로 세가 대단했다. 1506년 연산군은 풍류를 즐기기위해 절을 폐사

시켰고 이후 이자리는 군사훈련소인 연무대, 총융청이 사용하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초등학교자

리로 이용되었다. 

요즘 학교들은 일반인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세검정초교도 마찬가지다. 평일오후나 토,공

휴일 답사를 원하는 사람들은 사전에 출입가능시간을 체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