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규는 가난을 덜기 위해 어린나이에 폐병을 앓고 있던 나이든 금광 사업가 조씨에게 시집을 간다
조씨 영감과 사이에 딸이 생겼는데 그 피붙이가 조봉희이다
조봉희는 결핵을 앓는 아버지와 격리가 필요하여 할아버지가 거두었다
조씨 영감이 지병으로 죽자 이학규는 금광 사업을 이어 받아 운영을 했다
사업장에 쌀을 공급해 주던 미곡상과 이학규는 가까워졌었고 이학규는 다시 아이를 가졌었다
그 아이가 후일 남노당 당수로 이름을 날렸던 공산주의자 박헌영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시가에서는 금광을 정리하고 이학규를 내 몰았다
슬픔으로 넋이 나간 이학규의 딸 조봉희는 승려가 되려 절을 찾았다가 기녀가 되어 호남의 만석군에 의해 머리를 얹는다
조봉희는 아들 김제술(한산스님)과 딸 김정진을 얻는다
박헌영은 남노당 사무실에서 헌신적으로 조력해 주던 여 간사와 사랑을 나누었고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고 삼칠도 지나지 않아 친정 아버지에게 머리끄댕이를 잡힌채 핏덩이와 헤어졌다
이후 박헌영의 아들은 김제술에의해 절에 보내어져 행자 승이 되어 자랐었다
한 편 금광사업을 하던 친척의 빚보증을 섰던 유복하던 김영한(김자야) 집은 몰락하고 만다
김영한은 가난을 피하여 15세 어린나이에 결혼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었다
시집살이는 날로 더욱 심해져 견디다 못해 달아나고 만다
달아난 김자야는 조선권번에 들어 기녀가 되었고, 함흥의 요정에서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고등학교 영어교사를 하던
천재 시인 백석의 나타샤(러시아의 순이)가 되었다
백석과 사랑앓이를 하던 김영한은 백석에게 자야(子夜)란 아호를 받았다
나타샤(김자야)는 서울로 내려왔었고 조선은 남북으로 나뉘었었다
공산당 활동을 하던 박헌영은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 국제학교를 다녔으며
국제학교 동기인 주세죽과 결혼을 하여 딸 박비비안나를 낳았으나
일제저항 활동을 하던 박헌영은 상해에서 체포되었었고 처 주세죽은 남편이 석방될 가망이 없을 것으로 여겨,
평소 의지하던 레닌국제학교 또 다른 동기인 김단야와 재혼을 하였다
<주세죽 박비비안나 박헌영>
이후 김단야는 모함을 받아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었고, 주세죽은 위험분자라고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되어 살다가 죽었으며
박헌영은 풀려나와 서울로 돌아와 남노당 당수로 공산활동을 하였으며 후원금으로 씨 다른 남매인 조봉희 이름으로
대원각(현 길상사)를 지었다
남북 분단이후 김자야는 대원각을 인수하여 최고의 요정으로 키워 운영을 하였으며
스님이 된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은 김자야에게 대원각을 돌려달라고 요구를 하였고 이에 긍정적인 화답을 한바,
원경스님은 이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으나 졸지에 김자야는 법정에게 대원각을 기부하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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