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 농업생산성은 높지 못했다. 더구나 경제는 폐쇄적 자급자족 경제였다. 즉 잉여물자(식량)가 넉넉지 않고, 물자가
부족한 경우가 오더라도 외부에서 조달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들이 민초들을 수탈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다면, 왕실, 지주로 대표되는 지배층과 농민으로 대표되는 피지배층 사이의 팽팽한 균형관계는 붕괴되서, 굶어 죽으
나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인 민초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즉 관리들의 탐욕은 잉여식량이 거의 없는 농민들을 극한으로 몰아, 나라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탐관오리들을 역모죄 다음의 중한 죄로 엄단한 뒤, 그 후손들의 벼슬길도 막아버림으로서 가중처벌했다.
또한 동양의 주류 이데올로기였던 유학은 사대부집단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억제하고 내면을 수양시켜 민본정치를 구현
하라고 강조함으로서 체제 유지에 기여해 왔다. 이런 순기능이 유가가 오랜 기간 동양의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주된 이유가 되었고, 유학의 이런 주장에 공감한 적지 않은 사대부들이 청백리가 되고자 하였다.
이런 바탕하에 형성된, 조선조의 일반적 인식에 따르면 백성을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수령을 뽑는 것이었다.
이는 수탈의 원인이 제도 자체가 아닌 ,관리들의 윤리적 측면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뿐 아니라
제도의 개혁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박지계도 그 중 한명이다.
박지계는 인조시기, 명망높던 산림의 한 사람으로 방납의 폐단시정등 민생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던 사람이다.
박지계는 인조11년 (1633) 상소를 올려, 방납의 폐단이 수령들 개인의 도덕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비록 이글이 방납의 폐단을 논하면서 나온 내용이지만, 부세와 관련된 부패의 그물망을 생생히 드러냄으로서, 청백리조
차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상황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서 청백리를 꿈꾸었던 사람들은 좌절하고 한편
으로 현실에 순응해 가면서 변해 갔던 것이다.
...부세가 무거워진 것이 여기에 이른 이유로, 폐단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경각사(서울의 중앙관청들)의 폐단이고,
둘째는 수령의 폐단이고 셋째는 간악한 아전의 폐단입니다.
지방 각관의 공물을 경각사에 상납할 때, 소위 색리의 인정가라는 것이 공물 자체에 비해 반드시 10배의 가격은 되어야
경각사에서 받아들입니다 ...묵은 폐단은 이미 오래되어 규례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수령이 청백리라 하더라도 상급
관청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결국 수령은 전례대로 소위 인정가를 백성들에게 거두게 됩니다...간혹 수령
중에 탐오한 자가 있어서 이전보다 더 많이 거두어서 횡렴의 길이 한번 성립되면, 뒤이어 수령이 된 자는 옛 규칙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 시비를 묻지 않고 한결 같이 따라합니다.
혹시 청백리로 자부하는 수령이 있어도 다만 관가의 재물을 취해서 자기 집에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다뿐이지, 횡렴의
규례는 고치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재상, 명사, 옛 친구, 친척에게 정리를 표시하고 그들의 궁핍함을 구하는 자료로 삼
습니다. 수령이 되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상과 명사가 그와 친교를 두터이 하지 않으니 단지 뒷날 좋은 직책을
얻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즉 옛친구와 친척이 화를 내는 정도를 넘어 관계마저 소원해 지니, 그 청백리로 자처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아주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벼슬을 능히 가벼이 여기는 선비가 아니면 이것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청백리로 자부하는 사람은 천 명,백 명 중 한 두 명일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탐욕스런 사람들입니다....서울의
관료들은 급료가 박하고 빈궁합니다. 부모를 섬기고 자식들을 기르는 데, 수령의 뇌물에 힘입어 의복, 음식 및 사치를
부리는 자료로 삼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들에게 수령들의 탐학한 상황을 말하면, 친소를 가리지 않고 말한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그러므로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들이 수령들의 탐학을 얻어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관찰사의경우에는 처리해야 할 문서가 산같이 쌓여 하루도 여가가 없으니, 어떻게 수령들의 행위를 관찰할 수 있겠습
니까? 간혹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수령들이 두려워 하여 온갖 일로 관찰사를 헐뜯습니다. 근년 이래 온 조정의
풍습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다수 의견을 따르는 것으로 상책을 삼는데, 관찰사는 한 사람일뿐입니다.
수령들의 헐뜯는 소리가 중론이 되어 널리 퍼집니다. 그러므로 관찰사가 된 자는 수령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 일을 삼을
뿐입니다. 단속하는 정치가 없으니 수령된 자들이 무슨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사대부가 경내에 많으면 수령들이 혹 중론을 두려워해서 감히 방종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령들은 자기
들 마음 대로 해서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청백리를 자임하는 수령들조차 상부기관에 대한 공물납부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 관례대로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권력자들에게 상납하지 않으면 다음 벼슬자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맺고 있는
모든 개인적 인간관계마저 끊어지게 된다는 점, 뇌물을 받는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국가에서 받는 급료가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점. 이 때문에 중앙에서도 지방수령의 업무에 대해서는 개인적 친소를 가리지 않고 가급적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일반적 분위기라는 점,감사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각 고을의 부세징수를 감독할 수 없다는 점등은 당시에 매우 일반적인
내용들이었다.
얼키고 설킨 부패망속에서 청백리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최선은 개인적 착복을 하지 않는 정도였다.
부패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적 문제였다. 부패는 사회적,행정적 관계의 타락 그 자체였다.
따라서 그 관계에 매여 있는 한, 이른바 청백리로 자부하는 관리라 하더라도 그 사회적,행정적 관계에서 소신대로 행동하
기는 힘들었다. 소신대로 행동한 다는 것은 상관,친척,친구등 개인적 인간관계, 미래에 대한 보장, 상부기관의 압박을 모두
던져 버린 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주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벼슬을 능히 가벼이 여기는 선비말고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런 사람은 천에 한명 백에 한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부패를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입장은 개인이 윤리적,사회적 관계를 이겨낼 수 있다고 가정할 때만 정당화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과거는 물론 현재도 찾아 보기 힘들다.
참고)
1.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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