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는 정몽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단심가이다. 그 속에는 단 하루도 조선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정몽주의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시와 짝을 이루는 이방원의 하여가와 함께, 두 시가 처음 실린 책은 심광세(1577-1624)가 지은 역사 시집
<해동악부>다. 그 내용이 <포은집속록>에도 그대로 재록되었다.
<해동악부>에는 시와 함께 시에 얽힌 일화도 실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이성계에게 민심이 쏠려 고려의 사
직이 위태롭게 되자, 정몽주는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불러 술을 권하며 하여
가를 불러 그의 의중을 떠 보았고, 정몽주가 단심가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자, 살해했다는 것이다.
<해동악부>는 광해군 5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고성에 유배되었던 심광세가 아이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시가
형태로 가르치려고, 광해군 9년(1617)에 편찬한 것이다.<해동악부>는 기자조선에서 연산군 시기까지 발생했
던 역사적 사건들을 44수의 시로 다루었는데, 정몽주와 관련된 일화는 <풍색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숙종 45년(1719) 정몽주의 후손 정찬휘는 <포은집>에 빠진 정몽주에 대한 기록들을 추가해서 <포은집 속록>
을 편찬하면서 <해동악부>의 풍색악 부분을 처음으로 옮겨 실었다.
세종 21년(1428) 처음 간행되어, 이후 숙종 3년(1677)까지 여덟 차례나 간행됐지만. 단 한 번도 실리지 않았
던 단심가가 정몽주 사후 225년만에 갑자기 나타나 심광세에 의해 복원되어 <포은집 속록>에 재록된 것이다.
따라서 단심가는 정몽주의 단심과 죽음을 극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17세기 초반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관하 논문은 장전섭(1983), 신영명(2008)등이 있다.
참고로 정몽주는 태종1년(1401) 복권되어 영의정부사가 증직되었고, 세종은 <충신도>에 그를 수록하여 널리
알렸다. 문종 즉위년(1450)에는 정몽주의 후손들을 찾아 관직을 제수하는 관행을 시작하였다.
중종 12년(1517) 마침내 조선 최초의 문묘 종사자가 되어, 조선 성리학 도통의 기원이 되었고 높이 떠받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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