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는 조선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살지 않았다. 하지만 중종12년(1517) 그는 조선 최초의 문묘종사자가 되었
고, 이후 조선 성리학 도통의 기원으로 높이 떠받들어 졌다.
고려의 충신이자, 조선의 역적이었던 정몽주는 갑자기 조선 시대정신의 표상으로 옹립되어, 모든 유림들이 가장
갈망하던 문묘에 배향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이제 정몽주의 문묘종사과정을 살펴보면서 그 내막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정몽주는 망해가는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탱하던 거목이었다. 개혁과 공양왕 옹립까지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지
만, 그가 왕위를 넘보자 이성계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공양왕 4년(1392) 3월 이성계
가 사냥을 하다 낙마하는 사고가 터졌다. 정몽주는 이 기회를 틈타, 그 해 4월 1일 그의 수족들인 조준, 정도전,
남은등을 귀양 보냈다. 하지만 사흘 뒤 그는 이방원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목은 베어져 개경 거리에 걸렸다.
조선 건국 초기, 정몽주에 대한 시선은 차가웠다. 태조 즉위 직후 개국공신의 추가 책봉 대상자 중 한 명이었던
민여익은 과거에 정몽주를 동정하며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인데 죽였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대간들의 반대를 받았
다. 반면 유만수등 26명은 정몽주를 논죄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이후에도, 그가 조선 유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조식(1501-1572)은 신돈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최영이 중국을 침범할 때, 정몽주가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을 비
판했으며, 정구(1543-1620) 역시 우왕과 창왕 부자를 섬겼으면서도 그들을 추방하는 데 가담했고, 그 공로로 공
신 책봉까지 받았던 정몽주의 처신을 들먹이며 그의 죽음이 가소롭다고 비난했다.
정몽주가 공민왕이 인정한 우왕과 창왕을 가짜로 규정한 것은 공민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었고, 이성계일파를 제거하려던 것은 조선에 대한 반역행위였기 때문에 그의 도덕적 일관성이 없는 정치적
행보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혁명의 순간에, 보장받은 부귀영화를 던져버리고 무너져 가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정몽주가 이성계
에게 했던 반역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심의 발로였다는 해석은 창업에서 수성으로 가는 조선왕조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태종 즉위년 권근은 정몽주의 복권을 주장했다.
그는 창업의 시대와 수성의 시대는 정치를 운영하는 원리 자체가 다르다고 강변했다. 창업의 시대에는 개국을
도운자들이 포상을 받고, 거부한 자들은 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창업의 시대는 반복되서는 안된다. 반복된다는 것은 혁명이 계속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성
의 시대에는 새로운 혁명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 윤리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에 공감할 수 있었던 충성 윤리의 극적인 전형은 조선 창업을 거부하며 희생된 전대
의 신하들이었다. 권근은 이점에 착안해 정몽주의 복권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는 정몽주가 역사의 대세를 알았음에도,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큰 절개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 태종은 재위1년(1401) 정몽주를 복권시키고, 그에게 영의정부사를 증직했다. 그의 복권은
불사이군의 충성심이 치세의 요건이라는 시대정신에 합의한 결과였다.
이어 세종은 정몽주를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다고 칭송하며, 그를 새로 발간하는 <충신도>라는
책자에 집어넣어 널리 알리게 하였다.
문종은 즉위년에 정몽주의 후손들을 찾아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고, 이는 성종대의 기록에서도 보여진다.
이처럼 정몽주는 그 이름만으로도 후손의 관직이 보장될 만큼 충성심의 표상이 되어갔다.
마침내 중종12년(1517) 정몽주는 조선 최초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는 조선을 위해서는 단 하루도 살지 않았던
고려인이었지만 문묘종사를 통해 조선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재탄생한 것이다. 문묘종사를 통해 그의 충성
심은 정치 윤리의 모범으로 공인되었고, 그의 학문은 조선 지식계보의 출발점이자 조선 성리학 도통의 기원으로
자리잡았다.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권근이 그의 정치적 복권을 건의한 태종1년(1401)부터 계산하면 116년만에, 그리고 그의
문묘종사가 처음 논의된 세조2년(1456)부터 계산하면 61년만에 실현되었다. 그만큼 그의 정치적 행보와 학문적
업적이 논란의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문묘종사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확정시킨 조광조시대를 기준으로, 그 시대의 정치적 당파성의 필
요에 부응하여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또한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그를 기원으로 하는 지식인 계보(도통)를 탄생
시켰다. 결국 조선조 도통의 선정은 학문의 순정성과 탁월성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논의 당시의 정치적
고려와 판단이 훨씬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묘가 왕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라면 문묘는 지식인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사당이다.
문묘는 종묘와 함께 유교국가의 이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공간이기에, 조선은 종묘 완공후, 문묘 건립을
서둘러 태조 7년(1398)에 완공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문묘에는 고려 때 종사된 설총, 최치원, 안향만 종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종 9년(1409)
사헌부는 이들외에 조선의 정신을 대표할 새로운 문묘 종사자를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상자의 기준은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헌신이었다. 즉 대상자는 상당한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갖추어야 했지만, 그 학문에는 도
덕적 진실성이 담겨야 했다. 그 진실성은 정치적 헌신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정치적 헌신이란 정치의 본질
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왕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묘 종사 대상자로 거론된 이들은 권근, 이제현, 이색, 정몽주등 이었지만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낙점되지 못
했다. 중종 5년(1510) 정몽주의 문묘종사 의견이 다시 나왔지만 고려에 충성을 받친 정몽주를 조선의 문묘에
종사시키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중종12년(1517)이 되었다. 이 해는 중종반정이 성공한 지 10여년이 지났고 박승종등 반정의 주역들도 모두 죽은
뒤였다. 그리고 조광조일파가 사림 전체의 공론을 이끄는 주역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반정이란 정치적 폭력을 제거해 정도를 회복한다는 뜻의 발란반정을 줄여 쓴 표현이다. 이 점에서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을 단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고, 그 폭정의 시초가 된 무오사화는 조의제문에서 시작했기 때문
에 조의제문의 저자 김종직은 폭정의 최대 희생자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조의제문은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
이기 때문에 폭정의 근원부터 손을 댈려면 세조에 대한 시각교정부터 시작해야 했다.
조광조일파는 먼저 성삼문,박팽년등의 복권과 그들의 선례로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주장하였다.
그럼으로써 군주의 폭정에 항거하는 지식인들의 권력 비판을 보장받으려 했으며, 이 것이야말로 중종반정의 진
정한 시대정신이라고 믿었다.
성상문, 박팽년 등이 세조에게는 역적이었지만 노산군에게는 충신이었습니다. 그 때는 부득이 죄를
물었지만 이제 와서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 (홍문관 정자 기준 중종12년)
세조에 대한 언급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조광조일파는 이틀만에 의견을 바꾸어 정몽주와 김굉필에 대
한 문묘종사를 주장했다. 중종은 정몽주에 대해서만 종사를 허락했다.
김굉필은 조광조의 스승이자 김종직의 제자였으며 그 역시 연산군의 폭정에 희생당했다. 원래 조광조일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도학의 계보(도통)를 형성하여, 부와 권력을 가진 훈구파에 대항하려고 했다. 지식인의 나
라 조선에서 도통(도학의 계보)는 설령 왕일지라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었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
는 언제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다. 도통은 지식인들에게 명분과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권력에 대항할 수
있게 했다.
조광조일파는 비록 정몽주뿐이지만, 그를 종사시켜,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희생된 지식인의 절의 정신을 치
세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으로 부활시켰다. 이점에서 정몽주는 김굉필의 정신적 기원이자 시대정신의 상징으
로 조광조일파에 의해 초혼된 인물인 것이다.
또한 정몽주의 절의정신이 반정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이 무리없이
조광조에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거쳐 김굉필, 조광조로 연결되는 계보 역시
무난했다.
이런 이유로 정몽주는 문묘 종사되었고. 조광조일파는 그로부터 시작된 도통이 자신들에게 연결된다고 주장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광조는 후일 문묘 종사됨으로써 국가에 의해 공인을 받았다.
선조 이후 분열된 사림들은 자신들의 학통에 속하는 사람들을 문묘에 종사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들이 문묘 종사되어야만, 자신들의 학통이 진정한 조선 성리학의 주류로 공인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1. 조선의 지식계보학/ 최연식 지음/ 옥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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