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생각과는 달리, 도산서원은 건립된 후 150여년 동안 그저 이황을 제향하는 하나의 서원에 불과
했다. 아니 오히려 관은 물론이고 지역 사족들의 상당수도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도산서원에
이황과 함께 유일하게 배향된, 그의 제자 조목 때문이었다.
광해군 6년(1614년) 11월 조목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에 종향되었다.
이황의 문하에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조목같은 걸출한 인물들을 포함해서 제자가 무려 삼백여명이 있었
지만, 도산서원에 제향된 사람은 조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조목은 약관 15세에 이황의 문하에 입문했다. 이후 30여년을 하루같이 이황을 시종하며 학문과 예법을 익
히고 선비로서의 행실과 출처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유성룡과 반목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의 처세관
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이자 일생의 대부분을 관료로서 살아오며 경세를 중시했다. 이
에 반해 조목은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과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그에 따라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황을
해석했다. 이황의 유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속내가 드러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임진왜란의 처리과정에서 조목은 유성룡이 화의를 주장한다며 그를 비난했다. 여기에 북인이 가세했다.
선조31년(1598년) 유성룡은 파직당했고 조목과 북인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퇴계
집>간행도 북인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완간되었다. 이제 조목은 선사의 현양사업을 주도하며 퇴계문하의
수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향촌에서의 우위도 재확인하였다.
조목과 북인의 결합으로 조목의 근거지인 예안지역은 북인세력권이 되었다. 퇴게학파의 본거지인 안동과
예안에 남북인이 공존하는 가운데 북인이 남인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선조 38년(1605년) 조목이 사망했다. 광해군3년(1611년) 북인 영수 정인홍은 문묘종사에 스승 조식이 빠
진 것에 불만을 품고 종사된 이언적과 이황을 비난하는 회퇴변척소를 올렸다. 팔도 유림들이 분노하고 자
신들의 학문연원인 이황을 배척하는 글이건만 조목의 문인들은 적극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스승 조목을
도산서원에 배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조정의 인가가 필요했고, 그것은 정인홍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인홍은 예안 사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조목의 배향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하지만 조목의 배향에 동의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배향은 사림의 중대사로 공론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결국 공론이 충분히
수렴되지 못한 상태에서 권력의 힘으로 배향이 결정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조목의 도산서원 배향은 친북
인에 대한 반대급부였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자. 그 댓가가 몰려왔다. 경상감사, 심지어는 예안현감으로부터도 심한 냉대
를 받았다. 그에 따라 북인인 조목의 문인들이 서원 운영에서 점차 손을 떼고 이황의 직계후손들이 그 빈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황의 후손들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거의 두배씩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도산서원이 위
치한 예안일대에 동성촌을 구성하여 살면서 1800년대에는 타성을 압도하는 예안 제일의 족세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이황의 후손들은 도산서원의 실질적 운영주체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이들이 운영
을 맡으면서 이황의 사묘로만 여겨졌던 도산서원이 서원 본연의 기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또한 예안을 넘어 안동일원, 영남일원의 여러 성씨들을 운영에 참가시키고 그들과 학문적,혈연적 유대를
확대시켜 나갔다. 그결과 이들 씨족들과 이황 후손들간에는 도산급문의 후손이라는 동질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황의 후손들은 퇴계의 학문을 선생학 혹은 도산학이라는 이름의 가학으로 계승, 발전시
켜 도산서원을 명실상부한 퇴계학 계승과 전파의 요람으로 만드는데 진력했다. 여기에는 출사를 포기하고
가학에 몰두한 몇몇 후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영,정조대에 이르자 조정의 시각이 달라졌다. 탕평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국왕이나 국정을 이끌어
가야 하는 노론과 소론이 정치적 필요에서 영남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남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영남의 학문적, 정신적 연원인 이황에 대한 예우가 필요했다. 이러한 사
정에서 이황을 모신 가묘나 도산서원에 대한 치제가 영조 9년(1733년)이후 100여년 동안 무려 8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그리고 영남사림들도 한직이기는 했지만 관직에 등용되기도 했다.
영,정조대 이후 도산서원은 국가의 지원아래 일개 서원이아닌 으뜸서원(수서원)으로 자리잡아 갔다.
그 위치로 올라서기까지에는 퇴계학이 가지는 학문적 깊이와 문인들과 후손들의 헌신 그리고 그 두요인이
결합해서 만든 영남의 학문적,정치적 강한 동질성의 유지가 밑바탕이 되었다.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후학들은 전국에 걸쳐 학파를 형성했는데 ,그들은 이황을 원류로 하고 도산서원을
중심에 놓았다. 따라서 도산서원은 이황이 가진 전국적 지명도 덕에 다른 서원보다 위상이 더 높아졌다.
18세기이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영남남인들은 도산서원을 주축으로 학문적, 이념적 영역을 구축해 나갔
고 그 결과 영남지역의 으뜸서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원은 지방의 공론을 대변하는 중요한 역활을 한다. 그 매개체가 통문인데 지금도 남아있는 도산서원의
통문을 보면 유림대회 참가, 투장건,열녀선양, 문집간행, 사림의 분위기 쇄신등 지역사회의 다양한 사안이
망라되어 있다. 이런 사안들을 도산서원이 주도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영남지역 공론을 실질적으로 이끌
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영남남인들은 향촌에 은거하며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의 예제에 더욱 집착하는 수구적
성향을 띠어 갔다, 그 결과 적서갈등등 수많은 문제가 불거졌고, 영남 사족의 공론을 대변하는 도산서원은
수구의 근원지가 되어갔다. 거기에 대한 반발로 이황의 위패가 도난당하고 서원안에서는 폭력이 난무했다
그럼에도 어떤 혁신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지 못한 서원은 결국 자신들의 하늘인 조
선의 멸망도 말없이 지켜 보았다.
1914년 토지조사부상 도산서원 소유 토지는 71293평으로 안동 최고의 지주였다. 그 대부분을 소작에 붙
였는데 소작료를 제 때 납부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도산서원은 이들을 잡아다 매질하기 일쑤였다.
1925년 이 것이 사회문제화되어 도산서원 철폐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 도산서원은 사당인 상덕사에 여성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다가 2002년도에야 비로소 이 규정을 폐지했
다.
참고)
1.도산서원을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한국국학진흥원 연구부 지음/ 새물결
2. 조선시대 당쟁사/ 이성무 지음/ 아름다운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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