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예 그리고 <주자가례>,<주례>,<의례>,<예기>

정암님 2015. 9. 25. 15:18

예: 

높고 낮음,등급을 나눠 차별하는 계층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사회질서를 도모하는 규정.

원래는 친족집단이나 향촌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부장적 존비질서를 규정하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군신관계나

국제외교의 양태같은 통치자계층 상호간의 내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까지 가르키게 됨.

예의 대상은 인륜 질서의 규정에서부터 관혼상제와 같은 통과의례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시와 규정등 범위가

넓다. 이러한 예를 관념화하는 데는 유가의 힘이 컸다. 시간이 흐를수록 법과 더불어 그 중요성이 커졌는 데, 법

이 이미 일어난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라면 예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하는 것으로 교화의 핵심원리로 자리매

김했다. 나아가 예는 예악으로 확대되어 일상적 의절을 넘어 사회와 문화를 관통하는 보편적 도덕의 존재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후한이 유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예제는 지배충의 내부질서를 규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처럼 예가 확대 이해됨에 따라 예에 대한 학문인 예학이 경학의 하나로 성립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대에 <주례>, <의례>, <예기>의 삼례가 만들어졌다.


<예기>: 예의 기록, 즉 예의 경에 대한 해설서

<주례>: 행정 법전. 주나라를 운영하는 데 필요했던 국가의례를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나중에 국가의 예에 해당

         되는 오례의 내용이 포함됨

<의례>: 주례의 내용에 사대부의 예에 해당하는 사례(士禮)를 더한 것. 관혼상제의 사례와 똑같지 않지만 사대부

         의 일상생활에 중점을 두는 예가 여기서 유래


예학의 획기적 변화는 송대에 이루어졌다.

<주례>는 북송에서 통치이념을 서술한 행정법전으로 존중되었고 개혁가 왕안석이 이를 개혁의 이론적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남송대에 이르러 <주례>는 과거과목에서 배제되었고 대신 예기의 부분인 <대학>과 <중용>

이 독립해 별도의 경전으로 다루어졌다. 이 책들은 성리학의 전체와 통치이념을 설명하는 전범이 됐다.

주희는 오경의 하나인 <예기>대신 <의례>를 경으로 삼고 <예기>는 <의례>의 전으로 격을 낮추었다. 주희는 만

년에 예학에 대한 구상을 <의례경전통해>에서 제시했다.


예학은 이론만이 아닌, 실제 행위,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는 측면이 있었다.


<주자가례>:  <문공가례>라고도 한다. 주희가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예를 정리한 책으로 사마광이 관혼상제등 

               가정내의 의식을 규정해서 쓴 예서인 <서의>와 정이의 예설을 참조해 만든 관혼상제의 실행 안내

               서다. 여러 의식을 함께하는 단위인 소가족을 통합하는 종법을 염두에 두었고,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양식과도 맞았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조선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예서다.


발췌 요약)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강응천등 지음/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