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누가 도산서원에서 이황의 위패를 훔쳤나?

정암님 2015. 9. 20. 13:02


           묘변을 당한 때부터 위안제까지 40여일동안, 온나라가 놀라고 상심하며 분주해서 통한을 품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길가의 상인들도 문을 닫고 범인을 쫓았으며, 아전과 천인들은 정성을 갖

           추어 의연금을 내고 다투어 위문했고 수령은 임무를 중지했고 관찰사는 거적자리에 앉아 대죄했고 

           정부는 의견을 올렸고 폐하께서는 크게 놀라 위판 재목을 하사하여 신주를 다시 만들고 제사를 거행

           하여 위안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봉안하던 날에는 정해진 기일이 촉박해 소식을 돌린 날이 불과 4, 5

           일이었으나, 모인 사람들이 3,4천명에다 조의가 6,7천냥에 이르렀습니다. 

            (도산서원 묘변 시일기, 1901년 12월 22일)


광무5년 (1901년) 11월 1일 도산서원 상덕사에 봉안된 이황의 위패가 도난당했다. 

이 사건은 조야의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전모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조정의 복구명령에 따라 12월 

17일 무려 5~6천명이 모인 가운데 새로 위패를 봉안한 다음, 고유제와 위안제를 치르고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도산서원뿐 아니라 온 나라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 것은 영남의 으뜸서원이자 절대적 존재인 도

서원과 그 배경인 이황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부정이자 직접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잡히지 않아 동기와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도산서원에 불만을 품은 비양반층의 소행인

만은 분명했다.


그 즈음 도산서원은 엄청난 분규에 휩싸여 있었다. 강당에 도끼질이 난무하고, 칼날이 번득였다.

그 분규의 주역들은 서얼둘이었다.


조선은 태종때부터 서얼을 현직에 기용하지 않는다는 규제를 만듬으로써, 서얼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족들의 축첩이 보편화되면서 16,17세기 사족가문의 적서비율이 비슷해졌고, 18,19세기가 되면 서얼

이 적자손보다 많아졌다. 이에 서얼들 사이에서 신분차별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고, 이는 16,17세기의 소통운

동으 연결됐다. 마침내 18세기가 되자 서얼허통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772년 영조는 서얼의 통청과 호부호형을 허용했으며, 각학교에서도 서얼들의 서열을 정하지 못하도록 했.

1777년 정조는 정유절목을 반포하여 서얼의 허통 범위를 문반 가운데 호조, 형조, 공조의 참상과 판관 이하 직

책으로 확대하고 규장각에 검서관을 두어 학식있는 서얼들을 대거 기용했다.

또한 양반들의 점유물이었던 서원의 임원직에 대한 임명 범위를 서얼에게까지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순조23년(1823년)에는 계미절목이 제정되어 서얼들에게 종2품까지의 한품과 청직으로서 사헌부의 관직이 허

용되었고, 철종2년(1851년)에는 신해허통절목으로 서얼의 완전한 청요직 진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서얼허통에 불만을 품은 세력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서얼의 향안을 불태우고 향교와서원에 서얼들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영남지역의 남인계 서원들에서 이런 점들이 두드러졌고 그 중심에 도산

서원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영남 남인들은 향촌에 은거하면서 예제를 더욱 강화시키고 이를 향촌에 강요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조정의 잇따른 허통조치에도 불구하고 더욱 심해지고 완강해

졌다. 그에 따른 이지역 서얼들의 저항 역시 극렬해졌다.

18세기가 되자, 서얼들은 더이상 거주지를 떠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양반행세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았다. 대신 스스로 집단화, 조직화하여 통청운동을 더욱 더 거세게 밀고 나갔다. 이들은 중앙관직의 진출은 물

론 향촌의 삼안인 향안(향청 참가자 즉 양반 명단), 교안(향교 학생 명단). 서안(서원 학생 명단)에의 입록과 그 

서열을 적서가 아닌 나이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원생으로만이 아닌 원임(서원의 임원)으로의 진출

도 요구했다.


하지만 서원을 장악한 양반유생들은 이런 요구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영남지역 으뜸서원(수서원)자리에

있던 도산서원은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서얼들의 이런 요구에 직면한 다른 서원들이 이황

이나 도산서원을 핑계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도산서원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도산서원은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중인이나 서얼은 비록 대,소과에 급제했다 하더라도 원생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이

다. 그리고 이것은 이황이 제정한 원규라고 했다. 물론 이황은 이런 규정을 만든 적이 없었다. 이황은 서원의 

문호를 모두에게 개방했다. 하지만 제자들과 지역 유림들은 서얼, 중인들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을 거부했고

그것이 이황의 뜻과 달리 서원의 전통이 되어버렸다.


이제 서얼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다. 도산서원이다. 여기를 무너뜨려야 영남지역에서 서얼들이 서원을 드

나들 수 있는 것이다.

1884년 경주 진사 이능모는 원임에 대한 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즉각 이미 허용했음에도 소

을 거부하는 행위를 폐습이자 해괴한 일로 간주하고  경상감사에게 상세히 조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감

사는 각 서원에 공문을 보내 허통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해하는 행위도 엄중 조치할 것임을 경고했다.

도산서원도 이 공문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예안의 서얼들은 즉각 원임 자리를 나눌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

다. 안동 풍산의 서얼들과 서얼들이 장악한 안동향교에서도 압박을 가했지만 도산서원은 도내 공론을 핑계

되며 묵묵부답이었다. 이에 서얼들은 방향을 바꾸어 사당 참배를 요구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참배가 거부되자, 서얼들이 몰려오고 이를 제지하는 노비, 임원들과 충돌했다. 양측의 충돌은 더욱 확대되어 

원의 전,현직 임원들에 대한 폭력행사와 햇불시위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황의 후손들 중에서도 서얼과 적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서얼과 그 반대편들사이에서 소송과 조정에 보내는 상소가 난무하였다.

조정은 서얼에 대한 소통이 대세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지방관에게 구습을 혁파하고 새롭게 도모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제하지는 않았다.


결국 조정은 원칙 확인을, 서얼들은 법적 근거를 확보했지만 도산서원 역시 입장을 굽히지 않고 뜻을 관철시

켰다. 이런 상태로 결실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서얼들은 비록 사변은 일으켰지만 이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황을 기리는 사당에 설 수 있게 

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18세기이래 도산서원뿐 아니라 예안,안동을 포함한 영남에서 이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도산서원의 권위

도 그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도산서원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면 이황의 권위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고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1901년 도산서원에서 이황의 위패가 도난당하고 끝내 찾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뜩이나 적서충돌로 위상

에 상처를 입은 도산서원은 이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이후 조선이 멸망했을 때 도산서원은 그 이전

의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조선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즈음 모두가 도산서원이 나라의 원기를 길러내고 ,나라를 지키는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득권만을 지키기 위해 발악했던 이 서원은 자신의 하늘도 지킬 수 없

다. 하물며 이런 상태에서 남의 하늘을 자처할 수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참고)

1. 도산서원을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 한국국학진흥연구원 연구부 지음/ 새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