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조선 세종의 폭압통치, 신음하는 백성들

정암님 2016. 12. 21. 22:51


우리가 일세의 성군으로 추앙하는 세종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그에게 좋은 평가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그 시기는 적어도 태평성대는 아니었다. 곳곳에 유랑민이 넘쳐났고 황해도 일대에는 도적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홍길동전의 배경이 세종치세이겠는가.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으로는 사대로 인한 물자와 인력 징발. 사민정책, 화폐유통 강요, 수령고소

금지법, 종부법 폐지등이었다. 하나같이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는 데 그 연유를 살펴보자.


1.사대로 인한 물자, 인력 징발

이것이 어찌 세종의 잘못이랴. 하필 그 시기 명나라 왕이 탐욕스런 영락제와 성덕제였다.

영락제는 북원을 친다는 명목으로 군마 일만필과 금,은등을 요구했다. 사냥광인 선덕제는 수시로 해동청

(매)을 요구해서 매를 잡을려고 전국의 감사, 수령등은 골머리를 앓았다. 나중에는 수백명의 해동청 체포

조를 전국에 파견하여 그 수발을 드느라 백성들은 곤죽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후궁과 시녀, 내시들도 

징발해서 딸가진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사신으로 온 환관들의 탐욕도 끝이 없었다. 세종이 원한 것

은 아니었지만 이 모두가 백성들의 고통이었다.

2. 사민정책

세종의 최대업적은 한글창제와 북방영토 개척이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과 6진을 개척했지만 그 땅을

완전한 조선땅으로 만들려면, 그곳에 백성이 살아야 했다. 하지만 춥고 황량한 땅으로 가려는 사람은 없

었다. 세종은 강압적인 사민정책을 실시했다. 함길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북방의 새 영토로 이주시키고

히3도(충청,경상,전라)사람들이 함길도 남쪽을 채우는 방식이었다. 대상자들은 명단에서 빠지기 위해 온

갖 수단을 동원했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자해를 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한 원망과 분노가 끊이지 않았다.

북방 이주지에서는 혹한으로 가축들이 죽어나가고 역질이 돌아 수천 명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종의 사민정책은 흔들림없이 추진되었다.

3. 화폐유통정책 추진

세종은 저화(종이 화폐)와 동전을 발행하여 유통시키려고 애를 썼다. 허나 당시 조선의 경제는 자급자족식

물물교환 경제여서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강경한 정책을 시행했다. 화폐가 아닌 것으로 

물물교환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곤장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사용한 것이다.

쌀 한 되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했고, 그 아내도 

목을 매어 죽는등 자살자가 속출했고 원성이 하늘에 닿았지만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한양이 폭동

전야로 흉흉해지자 그제서야 물러섰지만 백성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4. 부민고소 금지법(수령고소 금지법)

세종2년, 백성이 모반죄와 살인죄이외 죄목으로 수령을 고소하는 경우, 수리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자를 

장 100대에 도(노역형)3년에 처하게 하였다. 상하존비를 확립시킨다는 명목을 내세웠으나 이후 수령들의 

가렴주구가 날로 심해져 재위기간 내내 존폐논란이 있었으나 끝내 유지시켰다.

5. 종부법 폐지

이 당시 부모 중 한명이라도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제가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노비

수가 증가하면서 군역부담자가 줄어들자 태종 14년 종부법이 시행됐다. 양인 아비와 노비 어미 사이의 자

식은 일정 기간 보충군으로 근무하면 아비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료들은 이 법이 

인륜을 어지럽히고 노비인구를 감소시킨다며 반발했고, 결국 1432년(세종 14년) 종부법 대상자를  관료와 

자 노비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한정시키며 유명무실해졌다. 또한 원래 불법인 양천교혼(양인과 노비의 

결혼)도 사실상 묵인하기로 하여 노비인구가 크게 늘어나 버렸다.

5. 탐관오리의 중용

황희같이 탐오한 무리들을 재주가 쓸만하다 하여 중용하였다. 정승이 뇌물을 밝히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

고 치부하는데도 왕이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중용을 하니 그 아래 조정신료들의 행태가 어떠 했겠는가.


후대의 역사가들이 널리 칭송한다고 해서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반드시 평안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무엇이 중요할까? 후대에 남겨질 유산과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질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단언

할 수 있을까?


참고)1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박시백 지음/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