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3층 구석진 곳에는 불교조각실이 있다. 어두운 조명에 좌우로 거대한 철불과 석불이 늘어선 사이, 그 정중앙에 정교하게 조각된 석불 두 구가 서있다. 이름하여 감산사 아미타여래상과 미륵보살상이다. 1915년 일제는 한일병합 5주년을 맞아 9월 11일부터 10월 말까지 50일간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열었다. 일제 통치 5년의 성과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대회였기 때문에 규모도 컸고, 총독부의 독려에 의해 관람객도 무려 116만 명에 이르렀다(이 중 절반이 무료 입장객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 인구의 7%가 행사장을 방문한 셈이다. 일제는 이 대회를 위해, 그 해 경주 내동면 신계리(현재 외동읍 괘릉리)의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두 불상을 경복궁 대회장으로 옮겨와 세워두었다. 이후 두 불상은 총독부에 의해 보관되었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 보관 전시되어 오고있다.
두 석상의 뒷면에는 조상기(불보살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가 새겨져 있다. 이 조상기는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다양한 논문들이 쏟아졌다. 이는 이렇게 분명한 조상기를 가진 완전한 불보살상을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다 조상기의 내용이 풍부해 신라문화 황금기인 성덕왕대의 정치 및 문화사를 유추할 수 있고, 그 시대의 서예, 문장의 수준을 확인하고 불보살상 연구의 양식사적 기준치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
두 석상의 높이는 아미타상이 275 cm, 미륵보살상이 270 cm이다. 아미타의 뒷면에는 21행 391자, 미륵보살에는 22행 381자가 새겨져 있다. 이 석상들이 가지는 가치를 정리해 보자.
1. 높은 조형적 완성도.
2. 조성목적과 경위, 제작 시기 등 여러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상기가 새겨진 금석문 사료
3. 신라 한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조동일(국문학자)은 두 석상이 미술사에서 획기적 의의를 가지듯, 명문 또한 문학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명작이라고 강조 했다. 불상을 조성한 과정을 설명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6두품의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문학으로의 획기적 전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문은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불상을 봉안한다는 것이 요지지만, 자신이 보탠 말이 더 많다. 공 식적으로 정해진 사연에 자신의 심정을 더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4. 719년(성덕왕 18년, 개원 7년 기미년) 2월 15일이라는 제작연도가 명시되어, 8세기 전기의 기년명 기준작이 된다.
통일신라 불교조각사의 시기구분에서 전기에 해당하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의 상들 중에는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기년명 작품이 많지 않다. 조성 시기가 확실한 기준작은 706년 경주 구황동(전 황복사지) 삼층석탑 출토 금제아미타여래좌상, 751년의 석굴암 석조여래좌상 정도다. 만약 719년 작 감산사상들이 없었다면, 통일신라 8세기 전반 약 50년간의 불교조각 전개양상을 파악하고 기술하는 데 지금보다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감산사상들은 조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신라 불상조각은 정적, 평면적에서 입체적, 역동적 모습으로 변모하고 그 양식은 8세기 중엽 완성되는데, 이후로는 모방작들만 양산되면서 쇠락하게 된다. 감산사 상들은 완성기로 가는 이행기에 위치하는 불상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준작이다.
5. 삼국유사 <남월산조>에 감산사 설명을 위해 두 석상의 조상기 요약문이 실려있어 감산사의 실체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8세기 통일신라 불교조각 기년명 기준작들로 본 흐름
발원자 김지성(金志誠)은 누구인가?(아미타상에는 김지전金志全으로 표기됨)(652-720 69세)
652년경 출생했다. 신라 17관등 중 여섯 번째인 아찬을 한등급 올린 중아찬까지 올랐다. 이는 6두품의 최고 관등이 아찬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골품은 6두품으로 짐작된다. 벼슬은 오늘날의 행정부 차관격인 집사시랑을 역임했다. 705년 당에 사신으로 가서 당의 상서봉어라는 관직을 받는 등 외교상 비중있는 역활을 했고, 은퇴할 무렵 집사시랑에 올랐다.
김지성은 평소 산수를 좋아하고 중국의 노장사상을 흠모하여 67세에 은퇴한 뒤에는 전원으로 돌아가 노자의 <도덕경> 및 <장자>의 소요편을 읽었다. 또한 인도 승려 무착이 지은 불교 서적인 <유가사지론>을 보며 불법에 깊이 심취하였다. 그가 관직에 있던 시기에 권력 투쟁에 참가했다가 몰락한 것도 이런 성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719년 위로는 국왕인 성덕왕과 이찬 김개원(무열왕의 여섯째 아들), 아래로는 동생과 누이, 전처와 후처 등 가족친지와 주변 지인들의 성불을 기원하며 본인 소유위 감산장전과 재산을 바쳐 서라벌 동남쪽(오늘날 경주 외동읍)에 감산사를 지었다. 또 돌아가신 부모의 은혜를 갚고 명복을 빌고자 각각 아미타상과 미륵보살상을 조성하여 이 절에 봉안하였다. 김신사 상들을 조성한 이듬해인 720년 4월 22일 향년 69세로 사망하였다.
참고)
1.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최완수 지음/ 대원사
2. 다큐멘터리 일제시대/ 이태영 지음/ 휴머니스트
3. 감산사 아미타여래상과 미륵보살상/ 허형욱 지음/ 박물관 역사문화교실/ 201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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