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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산사 아미타여래상과 미륵보살상에 관한 이야기 2편

정암님 2019. 3. 24. 23:41


감산사 상들의 배경과 도상적 특징


성덕왕대인 8세기 초반은 자연재해와 기근이 빈번하여 어려움이 많았으나, 외교와 정치면에서는 그 이전보다 안정되면서 국가의 위상이 상승하던 시기였다. 불교에서는 7세기 후반 통일기에 발전했던 교학 및 신앙의 대중화가 계승 발전되어 8세기 중반 경덕왕대에 꽃피는 불교 미술문화의 토대가 마련되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성덕왕 자신도 전광대왕이라는 불교식 왕명을 지닌 신라 중대의 유일한 군주로,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이 시기는 당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때였다. 성덕왕은 재위 36년간 총 43회에 걸쳐 당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는 신라와 당의 교류사 전체의 3분의 1일에 해당하는 횟수다. 이런 기류를 타고 7세기 후반부터 불교 조각에서 당의 양식들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발전시켜 8세기 중반에는 석굴암으로 상징되는 신라적 조각양식을 완성하였다. 8세기 전기의 감산사상들은 그 전단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거시적으로 당시 동아시아에 유행하던 국제 조각양식의 흐름 속에서 논할 수 있다. 당의 불상은 7세기 중후반 현장같은 구법승들이 인도 및 서역에서 돌아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새로운 조각양식에 양향을 받아 크게 변모하였다. 그 특징은 서역풍의 관능적 비만성이다. 감산사 아미타상의 신체와 밀착된 Y자형 옷주름, 미륵상의 천의와 영락장식 등의 장신구를 두른 방법 등도 이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외래 양식이 도입될 때, 초기에는 형태만 충실히 따르고 익숙하지 않는 얼굴과 복식은 어정쩡하게 처리하여 조각적으로 걸리고 서툰 모습을 보인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밀해지고 토착화하는 쪽으로 간다. 우리는 이렇게 완성된 모습을 석굴암 본존불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감산사 상들은 그 이전 시대의 것으로 두툼한 두 눈과 넓적한 얼굴, 약간 수줍은 듯한 표정, 경직감이 느껴지는 네모난 몸의 형태 등 토속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당시 동아시아를 강타하던 관능적 표현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 불상들은 인체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강조나 과장하는데 비해 신라 불상들은 관능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차별화를 하고 있다. 이런 양상들을 볼 때, 두 상을 조각하던 석공은 분명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새로운 조각 양식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변화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투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로 감산사 불상은 섬세하고 경건하면서도 화려하고 단정한 특징을 보여준다.

감산사 상들은 8세기 전반 동아시아 불교 조각의 국제적 양식을 기본으로, 신라인들이 져녔던 불성에 대한 관념과 선호했던 미감을 보여줌으로써 불교 조각의 신라화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감산사 미륵보살 입상과 아미타여래상의 의문점들(김대성? 김지전?/ 조성시기)


미륵보살상 조상기는 조성동기, 머리말, 김지성의 생애, 발원 내용,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아미타상 조상기는 일단 창건자가 김지성이 아닌 김지전으로 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 내용 구성에서도 머리말, 김지전의 생애, 발원내용은 미륵상 조상기와 공통이나 앞부분에 조성 동기가 없는 대신 명문을 새기는데 관여한 사람들, 아버지의 장례식, 김지전의 사망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두 불상의 조상기에 조성자의 이름은 다르게 표시되어 있지만, 김지성과 김지전 모두 관등이 중아찬이고 발원자의 아버지, 전처, 후처, 누이의 이름이 모두 같기 때문에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불상의 조성시기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불 조상기에는 김지성이 개원 7년(719) 미륵상을 만든다는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있어 미륵보살상의 조성 시기는 719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아미타상에는 김지전(=김지성)이 성덕왕 19년(720)에 죽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 미륵상의 명문은 겸양어가 사용된 반면 아미타상의 명문은 김지성에 대한 서술이 더 극진하며, 발원문 중간에 왕명에 의해 나마 총(설총이라는 견해도 있다.)이 글을 짓고 승려인 경용과 대사 김취원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미륵상은 김지성 생전에 완성되어 명문의 내용이 김지성의 서술을 반영한 반면, 아미타상은 김지성의 사후 왕명을 받들어 나마 총이 찬한 것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미륵상이 먼저 조성된 후 아미타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되었고, 아미타상의 조성연대는 김지성의 사망연대인 720년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달리 두 불상의 조성 시기 차이를 더 크게 보는 견해도 있다. 미륵상 조성기에는 김지성의 부모 외에는 모두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 아미타상 조성기에는 누이와 친족 대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아미타상 조성기에는 김지성이 집사시랑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명칭은 경덕왕 6년(747)에 개정된 명칭이다. 이렇게 친족들이 사망한 점과 관직명의 변경 시점이 미륵상 조성시기 이후라는 점에 주목하여 두 불상의 조성 시기에는 약 30년의 시차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감산사 불상들에 대한 이모저모


감산사 상들의 가장 큰 도상적 특징은 아미타와 미륵이 한 쌍을 이루어 세트로 조합되었다는 것이다. 후일의 기록인 <삼국유사>를 보면 미륵존상이 감산사의 금당주였다고 적혀있는데, 여타 기록이 없어서 불상 배치로 유추할 수 있는 불교 사상과 종파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일단 법상종 계열이라는 주장이 있다. 

감산사 상들의 제작 날짜인 2월 15일은 석가모니가 사망한 열반일이다. 석탄일이나 열반일 등 불교의 특정 기념일에 불사를 진행하던 당시 풍속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고려 연등회도 열반일인 2월 15일날 열린다.

상들은 세부 처리가 불명료하거나 도식적이어서 부자연스러운 곳들이 있으며, 정면의 부피감에 비해 옆에서 보면 입체감이 적다. 이는 이 상의 모본이 3차원 조각이나 부조가 아닌 2차원 회화(도본)였을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상들은 전체적으로 비슷한 틀을 갖춘 듯 하면서도, 광배와 대좌의 세부표현은 서로 변화를 준 것이 뚜렷하다.

상의 몸체를 대좌에 꽂는 결구 방식이 아미타상은 둥근 원형이고, 미륵보살상은 네모난 방형이다. 이는 단순히 조형상의 변화를 위한 것 또는 구조의 안정을 고려한 기능적 장치일 수도 있으나, 원형과 방형이 지닌(원형이 급이 높다) 전통적 대비개념을 의식적으로 적용한 것일 수도 있다.


                                                           미륵보살상의 방형 결구 방식


감산사 불상들을 통해 본 신라 사회와 불교신앙


신라 불교사상과 효사상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불교가 중국에 포교되던 초창기, 중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시각은 좋지 않았다. 우선 삭발과 어깨를 드러내는(편단우견) 행위는 고대 중국에서는 죄수나 하층민들이 하는 습속이었다. 더우기 인연을 상대적으로 여겨 부모와의 연을 끊는 행위에 대해서는 거센 반감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불교는 부모은중경같은 위서(중국에서 만든 불경)를 만들어 퍼트리고, 내세가 없는 유교의 약점을 파고들어 부모의 극락왕생을 위한 효사상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이미지를 불식하고자 하였다.

김지성은 죽은 부모의 은혜를 갚고 명복을 빌고자 두 불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했고, 설화지만 후일의 김대성은 석굴암과 불국사를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했다. 이처럼 신라 사회에서 효사상과 불교는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후일담이지만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효선편이 따로 있다. 


참고)

1.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최완수 지음/ 대원사

2. 다큐멘터리 일제시대/ 이태영 지음/ 휴머니스트

3. 감산사 아미타여래상과 미륵보살상/ 허형욱 지음/ 박물관 역사문화교실/ 20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