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줄기차게 내렸다. 나는 불안감을 감추면서 잠을 청해야 했다.
잠에서 깨어나니 비는 멈추어 있었다 서늘한 아침공기를 마시면서 건봉사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창건된 1500년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하지만 그 긴세월속에
온갖 영욕이 깃들어 있으니, 새옹지마의 고사를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도선,나옹등 숱한 고승들이 기거하였다 27년 5개월간 아미타불 염불을 외우며
수행하는 염불만일회를 처음 시작한 곳도 건봉사였다.
억불정책이 극성을 떨던 조선조, 세조가 닷새동안 머물며 자신의 원당으로 삼았다 이후 왕실의 후원을
빋으며 조선4대사찰의 하나로 번성했다.임진왜란이 터지자,사명대사는 승군 700여명을 이곳에서
조련했다. 호국사찰의 위상이 더해진 것이다.
임진왜란때 왜군은 통도사의 사리를 강탈해 갔다. 사명대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사리를 되찾았고,그중
석가모니의 치아사리는 만약을 대비해서 건봉사에 봉안했다 이것이 훗날 도굴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
는가...
정점에 올랐는가... 일제강점기가 되자,일본은 조선불교를 장악하고 부일세력화하기위해 1911년 6월
사찰령을 제정했다 이때의 건봉사는 31본사중의 하나로서 설악산의 신흥사,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리고 100여명의 승려가 기거하는 대가람이었다
위용은 대단했다 하지만 속은 뒤틀리고 있었다 일제는 호국사찰의 상징인 건봉사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친일주지의 임명을 시작으로 일본풍의 절집으로 바뀌어갔다.
현재 건봉사내에 남아있는 불이문,한국불교에서 형식을 찾아볼수 없는 십바라밀석주,日자형 연못인 연지,
사찰주변의 벚나무등은 이때의 씁슬한 흔적들이다.
---1920년대 세워진 불이문 기둥에 금강저가 새겨져 있다---
---한국불교에서 형식을 찾아볼수 없는 십바라밀석주 두개중 하나---
고려때까지 융성했던 불교는 수많은 절집들을 곳곳에 세웠다. 그들 대부분이 조선조와 한국전쟁때
사라졌다. 조선의 가혹한 억불정책으로 고려때 사찰의 100분의 일만 살아남았다. 이중 상당수가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사찰은 산속에 있어서 빨치산과 인민군의 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건봉사도 이때 폐허가 되었다 살아남은 것은 불이문뿐이었다.더구나 휴전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민통선내에 포함되서, 40년간 인적이 드물었다.
---- 1920년대 건봉사 모습---
1986년 6월10일 민간인출입이 어려운 이지역에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이 찾아왔다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한 이들은 사적조사운운하더니 치아사리를 훔쳐 달아났다 이들은 위장한 도굴범들이었다.
그런데 조계종 총무원 어느 직원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서 도굴당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직원은 현장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좀처럼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을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모호텔 카운터에 맡겨 놓았으니 찾아가라는것이었다.급히 가서보니 치아8과가 있었다.
원래 건봉사 사리탑안에 봉안된 진신치아는 12과였다(세계적으로 스리랑카에 3과,한국에 12과가 있다고
한다)4과의 행방이 묘연했다.
청와대는 이 사건을 중시했다 검경이 합동으로 도굴범들을 추적, 4명을 신속히 검거했으나 한명은 놓치고
말았다.더불어 치아사리 4과의 행방도 오리무중에 빠지고 말았다.
도굴범들은 며칠씩 꿈에 부처가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바람에 불안에 떨었다 한달여만에
그들은 호텔 카운터에 치아사리를 맡기고 도주했다가 검거된 것이다.
---건봉사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치아사리 5과-----
조계종은 되찾은 치아사리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헌금이 산처럼 쌓였다 이 자금으로 불교방송을
세웠다 조계종은 사리를 돌려주지 않았다, 길고 긴 소송끝에 사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전화위복인가..치아사리도굴사건으로 잊혀진 건봉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1988년 민통선에서
해제되면서 일반인의 출입도 자유로와졌다 지금 건봉사는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건봉사는 치아사리8과중 5과는 일반인들에게 상시 공개하고 3과는 새로 조성한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사진은 건봉사홈피에서 가져옴)-----
--조선조때 만들어진 도굴전 사리탑(건봉사 홈피 사진)---
---건봉사는 지금 중창불사중이다----
--보물 1336호로 지정된 건봉사 능파교-----
건봉사로 들어가는 길에 홍예교(무지개 다리)가 있다. 석재는 수직압에 강하고 측방압에 약하다 .
이런 석재의 특징을 잘 활용한 것이 홍예교다. 홍예구조는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보기에 아름답다
조선조때 나타난 양식으로 홍예교의 상당수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능파의 의미는 고해의 바다를 헤치고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불이문에 다가서기전에 측면에 부도밭이 있다. 원래 경내에 200여기의 부도와 비가 흩어져 있었다
하나 상당수가 도굴되고 , 남은 것들을 모아서 80년대 중반 현재자리에 부도밭을 만들었다.
스님은 집착을 버리라한다. 입구를 나서면서 산사에서 잃어버렸던( 착각일지도 모른다) 집착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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