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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마을 400년 이야기:태동부터 현재까지

정암님 2012. 2. 9. 23:07


개발의 광풍속에 많은 전통마을이 파괴되었다 이제 전통민속마을이란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는

곳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중에 안동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있다.

하회마을은 마을구조와 중요한 건축물은 보존했지만, 많은 민박집과 식당,상점들이 들어찬 관광

지로 변해버렸다.그나마 낙안마을처럼 세트장이 안된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다.이 모든것

이 민속마을조차 개발의 방법을 통해 보존하려던 그릇된 시도의 결과이다

건축과 마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가치가 없다. 보존이란 과거의 상태를 유지하는것이

아니라 과거의 구조를 잃지않으면서, 시대적변화가 중첩되어 쌓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전통마을들은 물리적 개조를 어느정도 허용하더라도 마을의 시설과 주민들이 살아숨쉬는 생명력

의 보존이 더욱 중요하다. 마을은 박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학자 김봉렬은 그런의미에서 양동마을을 살아 숨쉬는 유일한 전통마을로 꼽고 있다.

그가 책을 썼던 2006년에는  식당도 주점도 민박집도 없었다. 보여주는 민속놀이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마을에는 뼈대있는 집안의 종손들이 중심을 잡고, 어린이들과 젊은 부녀자들의 활기가

마을에 가득찼다. 인구감소도 미미했다. 마을의 구조와 살림집의 모습은 물론, 산과 들의 풍경까지

고스란히 보존된 곳이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30분거리에 경주와 포항이 있어서 출퇴근이 가능하고 도시의 문화생활도 누릴수 있으며 지척인 안강

읍에 독점군수산업체인 풍산금속이 자리잡아 취업에 유리했다. 또한 교육열이 높아서 일제강점기부

터 수많은 고위공무원,교수,사업가들을 배출했다. 이런 이유로 탐방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구차한

장사를 하지 않아도 먹고 살수 있었고,  비록 낡은집에 살지만 그것을 긍지와 자랑으로 삼을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충만했었다.


초겨울의 양동마을 주차장:  날씨가 추운데도 사람들이 꽤 있는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후인 지금은 많이 변했다.계기는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정이

었다. 경주시는 관광객이 급증하여 수입이 늘고, 토건업자들은 수반되는 사업을 따고, 자치단체장은

치적하나를 내세울수 있게 되었다.물론 관에서 제반시설을 관리하고 도움을 주니 장점도 많지만

관광객을 상대로한 식당,민박집이 늘어나게 되었다.한적한 마을이 사람들로 붐비고 옛날에는 길손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마을사람들도 대문을 걸어잠그게 되었다.

이것 참 좋다고 해야될지 나쁘다고 해야 될지 ...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자형 지세:4개의 산등성이와 골짜기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이마을은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동거하는 희귀한 양성씨족마을이다.

월성손씨의 입향조 손소에게는 손중돈이란 걸출한 아들이 있었고, 딸은 회재 이언적의 어머니가

되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은 이언적을 손중돈이 데려다 키웠고, 이언적은 후일 동방오현에 오르면서

문묘에 배향되는 큰 인물이 되었다.

이언적과 그의 형제들이 양동마을에 정착하면서,  명성과 재력이 비슷한 양가문의 협력과 경쟁이 시작

되었고, 그것이 400년 양동마을사가 되었다. 두가문은 한편으로는 과거급제자수와 고위관료숫자로

겨루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내에 세워지는 건축물들로 겨루었다.

그 결과 200년이상된 큰 건축물만 30여호가 남아있고, 이 건물들은 질적인 면에서도 최고수준을

자랑한다. 가문간의 경쟁의식은 건축의 완성도를 높였고, 현존하는 전통마을 가운데 가장높은 수준의

건축물을 보유하는 결과를 낳았다.





임진왜란은 한국건축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중의 하나다. 7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불타

버렸다. 전후, 새로운 건축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에 세워졌는데, 이때 형태와 구조의 변화가

뚜렷하게 일어난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해 임진왜란이전에 세워져 현존하는 살림집은 매우 희소하다.

현재 10채내외가 남아있는데, 양동마을에 무려 4채가 남아있다(서백당,관가정,향단,무첨당)

양동마을은 단위마을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데 국보 1점,보물 4점,중요민속자료 13점,

경북 지방문화재 5점,향토문화재 9점등 총32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서백당:월성 손씨 대종가


                                                                             관가정


양동의 주택들은 개별적 구성이나 의도를 담고 있어서, 서로간의 공통성보다는 개별성이 돋보인다.

이중 유명한 건축물들은 다음과 같다.

1.관가정(보물442호):손중돈이 분가후 지은집으로 손씨가의 대종가역활을 함. 논리적이고 규범적인

배열이 돋보인다.

2.향단(보물412호):이언적이 동생인 이언괄에게 지어준 집. 이언적은 집을 여러채 지었는데 한결같이

독창적이어서 그의 건축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다. 이집역시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구성을 보여

준다.

3,서백당:월성손씨 입향조인 손소가 지은집으로 월성손씨 대종가.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대종가의

지위가 400년간 관가정으로 옮겨갔다가, 20세기전반부에 종손이 다시 이주하여 대종가지위를 되찾음.

4.무첨당(보물 411호):여강이씨의 대종가.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살림채를 세웠고, 후일 이언적이

별당인 무첨당을 세움. 강렬한 느낌과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그외 수졸당,두곡고택,낙선당등도 볼만한 주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