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척(순종)이 죽었다. 일본경찰은 아연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희(고종)의 장례일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 불과 7년전이었다.그 여파로 조선총독까지 경질됐다. 또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이척의 장례일이 6월10일로 결정되자, 경찰은 비상 근무체제에 들어갔다. 시내안팎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치고,요시찰자에 대한 감시가 강화됐다.
1907년이래 구한말 의병투쟁은 왕당파가 주도했다.하지만 한일병합이후 왕당파는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독립이란 곧 어떤 체제를 가진 국가가 들어선다는 말이다. 왕당파가 꿈꾸는 나라는 극소수
인 왕족과 벌열들만 잘사는 나라였다.그들외에 그 누구도 부패와 가렴주구가 판을 치는 조선왕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은 운동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그속에서 폭발하는 민중들을 보았던
것이다. 모두가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교묘한 문화정책속에 민족해방운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조하고 있었다. 공화주의는 조선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무엇인가 민
중들을 해방운동으로 불러모을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그대안으로 주목받은 사상이 사회주의였
다.
칼 막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면서,결국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사회주의가 필연적
으로 도래한다고 치밀한 논리로 주장했다. 그 시대는 바로 노동자,농민이 세계의 주체가 되는 시대
라는 것이다. 많은 운동가들은 이사상이야말로 조선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노동자들을 민
족해방운동으로 끌어오리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사상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사회를 강타했다. 막스보이 엥겔스레이디란 말이 유행할 정
도로 사회주의이론을 한구절이라도 읊지 못한다면 어울리지를 못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자,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 나타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됐다. 하지만 얼마 못가
경찰에 조직이 노출되면서 검거선풍이 전 조선을 휩쓸었다. 1926년, 강달영은 제2기 조선공산당
(이하 조공)책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직을 추스르는 한편, 민족주의자들과 적극적인 연대를
추구했다. 이 시기는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이 우선되어야 하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자연히 지지세력도 불어날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이척이 죽었다. 조공은 천도교구파와 대한
독립당을조직하고, 이척의 장례일에 맞추어 대규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 임무는 조공
청년조직인 고려공청 책임비서인 권오설에게 맡겨졌다.
권오설
1926년 4월26일 이척(순종)이 죽었다. 혁명가들은 그의 장례일인 6월 10일에 맞추어 거사를 준비
했다. 그날 우리민족은 죽은 왕자가 아닌, 살아있는 겨레의 자유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리라..
권오설은 박래원에게 원고 5종과 200원을 주고 격문인쇄를 부탁했다. 박래원은 인쇄기 2대를 구입
해, 민가에 은신하며 밤낮없이 인쇄해 약 5만장의 격문을 만들었다.이를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배
포해 3.1운동에 버금가는 전국적인 시위로 이끌 작정이었다.그런데 보관이 문제였다. 도처에서 밀
정들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고심끝에 경찰이 제일 주목하고 있는 천도교 중앙본부 교당 지하실
에 숨겨놓았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하지 않는가..
발단은 우연잖게 터졌다. 6월5일,중국화폐 위조범들을 쫓던 경찰은 용의자 이동규의 은신처를 급
습했다. 그곳에서 이동규를 검거하고 위조지폐다발을 압수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안방 재떨이
에서 구겨진채 버려진 불온 유인물 한장을 발견한 것이다.대한독립당명의의 소형 삐라였다. 유인
물에는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그를 위해 싸울 것을 선동하는 불온한 말들이 빼곡히 쓰여
져 있었고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결 만세!,대한독립만세!"란 구호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일본경찰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너무나 엉뚱한 곳에서 불온 계획의 첫 물증이 나왔기 때문
이다.유인물 출처에 대한 매서운 추궁이 이어졌다. 출처는 고우섭이었다. 그녀는 천도교계열인 개
벽사의 직원이었다. 고우섭은 천도교 중앙본부 교당안에 대한독립당 삐라가 숨겨져 있다고 토설
했다.교당구내애 거주하는 개벽사 간부부인에게 은밀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속에 있는 유인물 두장을 빼냈으며 그날 저녁 남편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6월6일 오후 4시경, 경찰은 천도교당을 급습해서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색끝에 5만매의 격문
이 들어있는 상자를 압수하고, 교당내에 있던 천도교간부들과 개벽사직원들을 모두연행했다. 그때
천도교당에 들어서던 박래원도 연행되었다.
검거선풍은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되서 서울전역에서 2백여명이 연행됐다.
이때만 해도,경찰은 불온계획이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중이라고 판단했다.그렇다면 누가 격문을
인쇄하게 했는가? 누가 격문보관을 천도교에 의뢰했는가? 경찰은 박래원을 지목했다. 그는 천도교
교주 박인호의 조카이고, 조선인쇄직공총연맹 상무집행위원이자 조선노농총동맹과 경성노동연맹
집행위원의 지위에 있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박래원에게 가혹한 취조와 고문이 계속됐다. 박래원은 다른사람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버텼지만
다음날 원고를 집필한 사람은 권오설이고 그에게 격문인쇄를 요청받고 6백원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게다가 그의 은신처까지 불어버렸다.
권오설이 누구인가? 작년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수배를 받자, 잠적한 뒤 행방이 묘연한 사회주의자
아닌가, 경찰은 와해된 조선공산당(조공)이 이렇게 빨리 조직을 정비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이
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6월7일 한낮이었다,형사들을 태운 자동차는 쏜살같이 달렸다.1초만 지체되었더라도 운명은 달라
졌을 것이다. 그때 권오설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상복을 입고,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채 걸어나오
고 있었다.형사대와 마주친, 권오설은 체포되었다.
6월9일 총독부는 무장한 일본군 5000명을 시내에 행진시켜 위압시위를 하고,3.1운동발생지인
파고다공원에 주둔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투쟁지도부가 와해되고 검거선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살아남은자들은 다시 일어섰다.
사회주의자들과 학생들은 8일 저녁부터 만여장의 격문을 다시 인쇄하고,다량의 태극기들을 만들
었다.
그날이 왔다.오전8시 이척의 시신을 실은 상여가 돈화문을 떠났다.기마경찰이 애도행렬을 주시하는
가운데 인산행렬이 황금정(을지로)까지 늘어섰다.
8시40분경 행렬이 송현동에 이르자 보성전문학생 수십명이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연희전문 학생들이 가세하고 기마경찰들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학생 수십명이 그자리에서
검거되었다. 행렬이 이를 때마다 관수교에서.황금정에서,훈련원에서,동대문에서,안감천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양복을 입은 한 청년이 깃발을 들고 호각을 불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
들이 따라서 만세를 불렀다. 곧바로 경찰들이 나타났고 군중들과 충돌했다.
시위는 고려공산청년회소속의 대학생들과 중앙고보,중동학교학생들이 중심인 통동계가 주도했다.
검거선풍이 더 세차게 불었다, 사건당일 종로서에 105명, 동대문서에 50여명,본정서에 10여명이 체
포되었다.
일제는 6.10만세운동의 배후에 제2기 조공이 있음을 밝혀내고, 책임비서 강달영을 비롯하여 150여명
의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로서 2기 조공은 무너지고 말았다.
1927년 9월13일 동아일보 : 1,2차 조선공산당 사건 보도 지면
권오설은 징역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 독방에서 복역중에 페럼으로 사망했다. 잔인한 고문
과 가혹한 심문으로 망가진 몸은 감옥의 열악한 식사와 힘든노역,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지 못했다.
1930년 4월17일, 나이 34세였다.
일제는 그의 시신을 함석철판으로 밀봉한채 가족들에게 건네 주었으며,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강
요했다.행여 그의 무덤이 운동가들의 성지가 될까 경계한 까닭이다. 결국 권오설은 봉분과 비석이
없는 평장으로 고향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2008년 무덤 이장시 발견된 권오설의 납땜으로 밀봉한 철제관
권오설...그는 죽은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 아니 망각하기를 강요당했다.
그가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897년 그는 경북 안동군 풍서면(현 풍천면)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에서 가난한 선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1950년대까지 그 유습은 뿌리깊게 남아있었다.더구나 상당수양반들은 부유하기까지했다.
가난하거나,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자들중에는 일제의 공무원과 경찰이 되서 출세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밀정이라도 하려는 자들이 득실거렸다.
조선조의 악습인 신분제와 이희(고종)와 민자영(민비)의 가렴주구에 민족정체성마저 무너져버린
그 암담한 시기에 권오설은 민족을 부둥켜 안았다. 민족해방을 위해서 사회주의를 수용했고, 죽는
날까지 싸웠다.그러다보면 언제가는 해방의 날이 온다고 믿었다.
이후 사회주의세력은 1930년대이래 민족해방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코민테른 종속성이 심화되면서 점차 민족보다는 계급이익을 중시하는 자들이 득세했다.계급이익
이란 한마디로 소련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민족을 우선시했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차갑고 황량한 벌판에서 죽어
갔다. 한민족해방운동사의 아픈 기록인 자유시참변,민생단사건,스탈린의 대숙청과 연해주한인들의
강제이주는 숱한 민족주의자들의 시체로 뒤덥혀 있다.
여담이지만 구한말에서 한국전쟁기까지 기록이 정리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몸은 썩어 백골이 되고, 백골이 풍화되어 흙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이름마저 망실되어 찾을수 없는
이들이 그 얼마던가...
1995년 김영삼정권은 북한과 연관이 없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하기 시작했다.
2005년 정부는 권오설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해방이 되고 오랜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고향마을에는 아직도 상처와 앙금이 남아있다.
해방이후 격화된 좌우갈등속에서 그를 따르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인고
의 세월을 보내왔다. 비록 복권이 되었지만 멀리서서 이를 흘겨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상처는 아물
지 않고 덥혀 있을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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