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릉
642년, 김춘추는 분노했다. 서남부의 요충지인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되고 사위인 품석과 딸이 죽었
기 때문이다. 원한을 갚으리라. 백제를 멸망시키리라... 그러려면 당의 군사가 필요했다. 그는 당의 환
심을 사기위해, 독자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의복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치고,
그 아들들을 당 조정에 상주시켜 당나라 왕을 호위하게 했다. 온갖 굴욕을 감내하면서 그날을 기다렸
다.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킨 그는 그다음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661년 아들인 문무왕은 그를 법흥왕이래 김씨 왕들의 세장지(대를 이어 장사지내는 곳)인 선도산일대
에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그앞에 최초로 중국식 비석을 세웠다. 이어 당제도를 본따 역시 처음으로
중국식 시호와 묘호를 받쳤다.
그 이전까지는 비석을 세울때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이용했지만, 문무왕이 돌거북받침(귀부)과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리돌(이수)형식을 갖춘 중국식 비를 처음 세운후,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석비의 전형
이 되었다. 무열왕비는 이런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경우다.
석비(탑비)의 일반적 구조
그러나 8-9세기부터 거북머리는 점차 용머리로 바뀌어갔다. 표현법도 사실적 형태에서 점차 위엄있고
추상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그 전형적인 예가 승탑비에서 나타난다.
선종은 조사를 높인다. 따라서 조사가 죽은후 화려한 승탑과 탑비가 세워졌다. 신라에 최초로 선종을
들여온 사람은 신행(704-779)이었다. 하지만 그 시대는 교종의 전성기였다. 신행은 결국 지리산근처의
산청 단속사에서 은거하다가 779년 사망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죽은후 30년이 지나 승탑비가 세워
졌다는데 단속사지는 철저히 파괴되어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 최초였을
승탑비의 형식은 알수 없다. 신행은 북종선을 들여왔지만, 남종선은 도의가 들여왔다. 도의의 승탑으
로 여기지는 것이 양양군 진전사지에 남아있지만 탑비는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신행선사비,도의선사
비,염거화상비등 초기 탑비는 남아있지 않지만 ,872년 세워진 태안사 적인선사비는 귀부와 이수가 남
아 있어 당시 모습을 대강 짐작할수 있다.
이보다 앞선 861년 제작된 실상사 증각대사비의 귀부는 무열왕비같은 거북머리였다. 그런데 10여년
뒤에 세워진 적인선사비 귀부는 용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 탑비가 현존하는 귀부중에 용머리로 바뀐
최초 사례로 볼수있다 또한 오른발을 뒤집는 색다른 동작을 하고 있는데, 이 양식은 이후 쌍봉사 철
감선사비(868년)로 이어진다.
무열왕비 돌거북받침(귀부) (661년)
무열왕비 귀부의 정면모습
쌍봉사 철감선사비 돌거북받침(868년)
철감선사비 귀부의 정면모습
고려시대에는 용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한 형태가 주종을 이루다가,12세기경에는 귀부형태의 비석이
대석형태로 바뀌면서 귀부는 차츰 사라져 간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귀부는 극소수만 존재하며, 그 형
식은 남북국시대 신라양식을 답습했지만 퇴화되고 도식화되었다.
대석형식의 비 (조선, 조광조 신도비) 출처:문화재청
여담이지만 석비(탑비)중에 비신이 깨진 것이 많다. 비신부가 약해서 저절로 깨진경우도 많지만 민초
들이 일부러 망가뜨린 것도 적지 않다.
조선은 문치의 국가였다. 그 시대를 사는 사대부들의 소망중 하나는 글씨를 잘 쓰는 것이었다.그러려
면 연습을 해야했고, 연습하기 위해서는 좋은 교본이 필요했다. 탑비를 받은자들은 대부분 국가가 인
정했던 인물들이라 나라는 예우를 갖춰 당시의 손꼽히는 명필들에게 글을 쓰게 했다. 아니면 중국과
한국의 명필들 글자를 집자해서 비석에 새겼다. 좋은 교본이 필요했던 사대부들은 이런 비문에 눈독
을 들였고 부지런히 탁본을 했다. 하지만 스스로 하기에는 수고로움이 많았다. 그래서 인근의 백성들
을 동원해서 탁본을 시켰다. 민초들은 죽을 맛이었다. 수시로 찾아와서 탁본하라고 귀찮게구니 원수
가 따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몰래 가서 비신을 부수어버렸다.
참고)
1.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최완수 지음/대원사
2.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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