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삼국유사를 소재로 한 논저가 3000편이 넘는다. 시중에는 삼국유사를 소재로 한 책의
가짓수가 370여종이며, 이는 삼국사기 200여종, 가장 인기있는 춘향전의 250여종보다 압도적이다.
그리스로마신화가 370여종으로 필적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을 한다. 민족의 고전 삼국유사는 발간직후부터 모든이들의 사랑을 받은 책이라
고...
19세기, 조선인들은 삼국유사란 책을 들어보지 못했다. 13세기말 삼국유사는 저자의 손을 떠난 뒤
오랫동안 잊혀지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책이 되었다. 어쩌다 읽는 사람도 혼쾌한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갑자기 나타나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말이다.
오늘날의 삼국유사현상은, 단적으로 말해서 20세기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이책의 어떤 측면이 이
런 관심을 촉발시켰을까? 그 밑에는 구한말의 어두운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78세였다. 일연은 낙향을 결심했다. 고령인 어머니도 걱정이었고, 쓰던 책도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는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로 들어갔다.이후 8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삼국유사를 다듬었다.
그가 살았던 시절은 처참했다. 산도 불타고 바다도 불탔다. 모든 곳이 불타는데 사람들이 어디로
피할수 있겠는가? 많은사람들이 죽었다. 바로 몽고와의 30년전쟁기간이었다. 말이 전쟁이지, 강
화도로 피난간 고려조정은 강건너 불보듯 하면서, 대장경으로 적을 물리친다고 백성들의 고혈을
더욱 짜냈다. 고려군은 보이지 않았고, 몽고군의 살육은 더욱 더 심해졌다. 백성들은 적들의 칼날
에 어육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저항하며 쓰러져 갔다. 그렇게 긴 전쟁은 끝나갔다.
일연은 참담했다. 그의 눈에 그렇게 쓰러저간 민초들이 어른거렸다. 그들도 역사의 일부라고 생
각했다. 지금까지의 역사서는 철저하게 왕조사였다. 즉 통치자 중심의 역사였다. 일연은 거기에
민초들의 이야기를 더했다. 또 외세에 짓밟혀 신음하는 고려백성들을 다독이고 싶었다. 우리는
천손, 즉 단군의 자손이니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이다. 조선조까지의 사서들은 한시대만을 다루
었다. 삼국사기, 고려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단군으로부터 시작해 삼한,삼국을 거쳐
고려조까지 연결된다. 즉 단군의 후손들은 어떤 환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민족사학의 선구적형태로. 일제강점기 근대민족사학자들이 높이 평가
하는 부분이다.
일연이 죽은후, 간행되었을 삼국유사는 고려말 조선초에 한차례 더 간행된 후,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새로 목판을 만들어 중간하였다 이때 나온 삼국유사를 임신본이라하는데, 대체로 200-
300질 정도 인쇄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 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황당한 신화,전설,설화들이 가득 들어 있을뿐아
니라 불교적 색채가 너무 진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에서 지
명,유적,전설을 수록하는데 인용되었으나, 점차 읽는이들이 줄어들고, 조선후기에는 드물게 책명
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책뿐 아니라 인용한 역사가들까지 비난하였고, 안정복은 이탄허탄, 한치
윤은 괴탄하다고 혹평하였다.19세기가 되자, 마침내 조선에서는 삼국유사를 아는 이가 사라졌다.
1904년 도쿄제대에서 근대식활자로 삼국유사를 찍어냈다. 원본은 도쿠가와가 소장본으로 현재 나
고야 호사문고에 있다. 이 도쿠가와본은 언제,어떻게, 어떤 경로로 전승되었는가를 알수있는 유일
한 본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에서 약탈당한 삼국유사는 조선인쇄술에 반한 도쿠가와의 소장본이 되
었다.일본왕실에 대여까지 할 정도로 비중있게 다루어진 이책은 학자들의 눈에 띨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왜 삼국유사를 찍어냈을까? 당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중이었
다. 조선을 식민지로 안정되게 운영하려면 조선의 모든것-역사,생활,풍습,지리등-을 알 필요가 있
었다. 그런 목적이라면 삼국사기보다 삼국유사가 더 유용했다. 그래서 도쿄제대는 이책을 조선을
가장 잘 알수 있는 책이라며 학생들의 교재로 출판했던 것이다.
1904년 최남선은 일본유학중이었다. 그는 망해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아니 그전에 민족정체성을 일으켜야 한다. 다양한 사상과 서적이
그 관점에서 재검토되었다. 그의 눈에 삼국유사가 들어왔다. 조선에는 없는 책이었다. 그책은 우리
모두를 단군의 자손, 같은민족이라고 쓰고 있었다. 또한 지배자중심의 역사가 이닌,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신화,전설,설화가 가득 담겨있었다. 이책은 그가 보기에 한국고대사의 최고원천이며 백과
전림이었다.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자랑스런 문화를 보여주는 책이었다.
최남선은 이책을 조선에서 출판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우여곡절끝에 1927년 잡지 계명 18호에 삼
국유사 원문 전체를 실어 전 조선땅에 배포했다.
삼국유사는 전 5권이다. 현재 국내외에 1512년 발행된 임신본은, 5권이 모두 있는 완본이 4종,일
부만 있는 결본이 4종 총 8종이 남아 있다.
조선초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되는, 1512년 이전본은 5종이 남아 있다 하는데 모두 결본이다.
일연사후, 13세기말 처음 간행되었겠지만 시기는 알수없다. 지금 남아있는 조선초 간행본 역시 발
문이 없어 인쇄시기,배포량,유포경로를 모른다.
@1512년 이전본 5종은 다음과 같다. (모두 결본)
1>곽영대본: 3,4,5권만 남아있음 (국보 306호, 소유자:곽영대)
2>손보기본: 1,2권만 남아있음 ( 2013년 연대에 기증)
3>조종업본: 2권만 남아있음
@1512년 (임신본)은 완본4종,결본4종이 남아있다. 완본4종의 소유처는 다음과 같다
1>호사문고본(일본): 도쿠가와가 소장본으로 나고야시 호사문고에 보관 언제,어떻게 ,어떤경로
로 전승되었는지 확실히 알수있는 유일한 본
2>순암수택본(일본):1916년 이마니시류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이후 일본천리대도서관에 기증
1925년 쿄토대학에서 영인본(원본 형태로 일반에 소개)으로 간행
중종때 인물인 김연이 구하여 18세기 실학자 안정복이 본 책
3>서울대 규장각본: 국보 306-2호
재야서지학자 황의돈이 한국전쟁직후 모처에서 구득하여 전형필의 소유로
넘어 갔다가, 서울대에 기증, 1975년 영인본으로 나온후 삼국유사연구자료
로 가장 널리 이용됨
4>만송문고본 : 만송 김완섭이 소장한 완본, 고려대도서관에 있음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화,종교,사상등 총체적 문화유산의 보고다. 또한 역사서이고
불교문화서이며 야담설화모음집, 소중한 문학서이다.
일연이 마지막을 보낸 인각사에는 깨진채로 남아있는 그의 비석이 있다. 비면에는 그가 지은 불교
서적 180여권의 이름이 적혀있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적혀 있지 않은 삼국유사만 전
하여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특징을 정리해 본다.
1>삼국사기는 중국사료에 크게 의존했지만, 삼국유사는 중국사료 27종뿐아니라 한국자료도 50종
넘게 인용하여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사료들의 윤곽과 내용을 추측하게 해주고, 각 항목의 주체
성을 살렸다.
2>출처를 수록했고, 내용보충이 필요하거나, 내용이 문제가 있을경우 주를 넣어 실증적으로 서술했다
3>14수의 향가,서기체,이두문,전적에 전하는 지명및 인명표기로 한국고대어및 고대문학의 귀한 자료
를 주었다.
4>조선조까지 역사서들은 삼국사기,고려사같이 시대사였을뿐이다. 따라서 시간적 연결을 중시하는 민
족사의 역활을 못했는데, 삼국유사는 단군에서 삼한,삼국을 거쳐 고려까지 통시대적으로 기술하여
민족사 발전체계의 선구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들이 높이 평가했다.
5>단군, 건국신화, 전설,설화등을 수록하여 한국의 고유문화를 존중하고, 유교의 도덕적 합리주의 사
관에 비판적태도를 취함으로서 민족자주성을 드러냈고, 이는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6>우리 문헌중 가야역사를 전해주는 유일한 역사서이다.
7>고대 불교사,불교미술사를 위한 중요한 자료다. 많은 절집,불상,탑등 불교의 유물, 유적에 대한 기
록이 풍부해, 조사연구의 기본적 문헌으로 꼽힌다.
8>풍류도를 수행하던 화랑과 낭도들에 대해, 삼국사기와는 다른 자료들을 보여준다.
참조>
1. 삼국유사/ 김원중 옮김 /민음사
2.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고운기 지음/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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