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아시아의 전성시대(14세기에서 18세기) 그리고 서구우월주의의 탄생

정암님 2015. 1. 4. 02:38

1800년대, 서유럽은 화석 연료 에너지를 토대로 한 경제를 운영하면서 산업생산과 군사력을 증대시켰다. 여기서 발생한

힘을 바탕으로  서구는  20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를 압도했다. 

1800년대이후 시대는 서구의 시대였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영광은, 그들이 문화적, 인종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우월

하기 때문에 따라온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그 주장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또 그들의 역사를 제3세계

들이 추종해야 할 역사라고 세뇌시켰다. 오리엔탈리즘(서구우월론)에 바탕을 둔 진보사관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제3세

계 학자들은 고국에 돌아와서 학계를 장악하고 서구의 주장을 널리 퍼트렸다. 대표적인 것이 근대화론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식민사관을 주입시켜 조선인들에게 열등감을 심어 주었다. 열등감에 빠진 자들은 기꺼이 일제

의 주구가 되었다. 해방후, 식민사관의 자리에 근대화론이 들어왔다. 근대화론은 한국인들에게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근대화론 자체가 서구우월주의에 기반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란 변방부의 특수한 역사 진행과정에서 추출한 근대화론이 전지구적 보편적 역사진행 과정일 수는 없다. 오늘날

서구에서조차 진보사관은 퇴락한 사조일 뿐이다. 그럼에도 세계여행을 다니다 보면 서구를 동경하고 동양을 비하하는

열등감에 쩔어 있는 한국인들을 차고 넘치도록 만난다. 한심한 자들이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마주치며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 자체에 법칙은 없다. 단지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심성

이 유사해서 경향을 만들어 낼 뿐이다. 즉 어느 시기, 다른 지역들 위에 군림한다고 해서 그들이 인종적,문화적으로 우수

한 것은 아니다. 서구의 우위는 지난 2천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에서 최근래 200여년의 일일 뿐이다.


역설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 나온 배경은 유럽의 동양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다.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세계의 부는

아시아에 쏠려 있었다. 유럽은 동양의 도자기와 차,비단을 사기 위해 막대한 은을 소모했고, 그 결과 만성적인 무역적자

에 허덕였다.

 

유럽의 군주들과 재력가들은 경쟁적으로 중국 도자기를 수집했다. 도자기가 더 많을수록, 더 비싼 것일수록 그만큼 자신

들의 부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중국의 풍습인 중국풍이 유행하면서 유럽인들의 열등감은 깊어져 갔

다. 새로운 에너지원인 석탄을 사용하여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지만, 누적되어 온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시기인 18세기 중반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유럽인들은 로마문명의 경이로움을 재인식 하였다.

빙켈만은 이런 로마문명의 정신적 기원이 그리스에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럽인에게 그리스문명은 비잔틴과 이슬람

문명의 뿌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문명과 자신들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빙켈만은 그의 저서 <고대미술사>에서 그리스 조각품을, 그 조각품을 만들어낸 그리스 시대를 열광적으로 찬양했다.

그는 그리스문명을 유럽문명의 모태로 끌어 올렸다. 그의 책은 유럽 문명을 기독교에서 탈피해 보다 합리적이고 세속적

으로 만들려고 했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 지식인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 갈 

새로운 정신적 힘의 모태가 필요했다. 


자기절제와 이성주의, 민주주의같은 우월한 덕목들과 사상들이 이미 수천년전부터 유럽지역에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그것을 계승해서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

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태고이래부터 이성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가진 유럽인들을 진보의 주체로 선택했고, 

진보의 주체인 자신들은 이 문명을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같은 퇴보적이고 전제적인 지역에 전파하여 모든 

지역을 문명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기에 자신들은 인종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무능한 자들의 가난, 경솔한 자들의 고통, 게으른 자들의 굶주림,강자들에 의해 밀려난 수많은 약자들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은 미래의 복지를 위한 법칙이다.(허버트 스펜서)


이렇게 서구의 우월주의는 만들어졌다. 동양에 대한 열등감의 반발로서 말이다.

그렇댜면 유럽이 동양에 열등감을 느끼고, 동양을 동경하던 14세기에서 18세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국 상품은 매우 값싸고 스페인 상품들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중국상품이 팔리지 않도록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의 가장들은 25페소면 아내들에게 중국산 비단을 선물할 수 있지만, 무려 200페소나 하는 스페인비단

     은 엄두도 낼수 없다. (1594년 페루의 스페인 총독)


     인도산 옥양목은 우리집과 옷장,침실까지 파고 들었다. 커튼부터 방석, 의자, 심지어 침대까지 모조리 옥양목이나 

     인도산 물건이 차지했다. 한마디로 여자들의 옷뿐 아니라 집안의 가구까지 양모나 비단으로 만든 거의 모든 물건

     들은 인도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17세기 후반 영국인들의 만담)


14세기에서 18세기까지 아시아는 세계인구와 경제활동, 세계무역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세계인구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1500년대에는 60%였지만, 1750년에는 66%로 증가했고, 1800년에는 

67%까지 상승했다. 1800년까지 세계인구의 3분의 2가 아시아에 거주한 것이다. 

숫자로 보면, 1400년에서 1750년까지 세계인구는 3억 5천만에서  7억2천만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중국은 1400년에서

1800년까지 인구가 8천5백만명에서 무려 4배가 많은 3억5천만명까지 증가했다.

이와같은 인구의 증가는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추가적인 자원을 아시아가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

다. 즉 아시아는 인구뿐 아니라 경제생산과 생산성도 증대하였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생산의 약 80%를 차지했는데, 이는 세계인구의 3분의 2인 아시아인들이 세계생산의 5분의 4를

차지했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1775년 세계인구의 5분의 1에 불과했던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 아메리카인들과 

께  겨우 세계생산의  5분의 1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1500년이후 3세기동안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경제를 운영했다.

1500년대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값싸고 뛰어난 품질의 상품을 생산했기 때문에 스페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시장을 순

간에 잠식했다. 페루의 리마에서도, 멕시코시티에서도 사람들은 중국산 비단을 입었다. 멕시코의 비단산업은 몰락하고 

말았다. 덕분에 1500년부터 1800년까지 중남미에서 생산된 은의 4분의 3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영국은 18세기에 산업혁명을 일으켜 면직물 산업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영국 국내시장은 인도산

면직물이 장악하고 있었다. 인도산이 훨씬 값싸고 품질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18세기 인도는 세계에

서 가장 큰 면직물 수출국가가 되었다. 1750년 기록을 보면, 인도는 전세계 면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하였다.


영국의 면직물 제조업자들은 영국의 임금이 높기 때문에 도저히 인도산과 가격경쟁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인도산의 가격이 낮은 이유가 인도인들의 저임금과 낮은 생활수준에 기인한다고 여겼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18세기 인도의 노동자들은 영국 노동자들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했다. 


그렇다면 인도의 경쟁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 해답은 아시아 농업의 높은 생산성에 있었다. 이시기 일반적인 노동자 가정의 경우 수입의 60-80%를 식량구입에 사

용했다. 따라서 식량가격은 실제 임금을 결정하는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인도는 중국,일본과 함께 작물의 수확량과 파종

된 씨앗의 비율이 20 대1 이었지만 영국은 겨우 8 대1 이었다. 아시아의 농업은 영국, 더 나아가 유럽보다 2배이상 높은 

산성을 유지했고 그만큼 식량가격은 저렴했다. 결국 인도는 명목임금은 낮았지만 실질임금은 높았던 것이다.


생산성 높은 농업이 아시아의 경쟁력이었다.

마침내 영국은  자국 면직물산업의 경쟁력이 인도산을 압도할 때까지 인도산 면제품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중국의 농업생산성은 작물의 수확량과 파종된 씨앗의 비율이 20 대 1 일정도로 대단히 높았다. 이로 인해 중국인구는

1650년 1억4천만명에서 1750년 2억2천5백만명, 1850년에는 3억8천만명에 육박했다. 

이 기간동안 중국은 고도로 효율적인 시장, 상품의 전문화, 수상으로 연결되는 내륙운송체제를 구축하여 중국전역에

곡물의 원활한 이동을 촉진시키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들을 유지했다. 이런 시스템은 당대 유럽과 미국보다 휠씬 더

효율성이 높았다.


1700년 중국,인도,유럽은 전세계 GDP에서 각각 23%씩을 차지했다. 세지역의 합은 전세계 GDP의 70%에 달했다.

1750년 중국은 전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33%를 차지했고, 인도,유럽은 각각  23%를 생산했으며, 세지역의 합은 전세

계 생산량의 90%에 육박했다.

그러다 1800년대 초반 전세계 GDP와 제조업 생산량에서 유럽의 비중이 급증했고, 1900년대 들어오면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1900년 전세계 제조업 생산량에서 중국은 7%, 인도는 2%에 그쳤지만, 유럽은 60%,미국이 20%

를 차지했다. 1900년 유럽과 미국은 전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80%를 장악했다.


18세기 중국과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는 전세계 부의 절반이상을 차지했지만 불과 2백년만에 세계에서 산업화에 뒤쳐

진 가난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서구와 이 지역의 격차가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서구는 자신들이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동양을 따라잡아 역전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아시아는 추월당하기 전에, 서구보다 더 훌륭한 시스템을 운영하면서 세계의 경제

와 무역을 장악했고, 더 선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300년이상 서구를 압도해 왔기 때문이다.


세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시아의 상승과 쇠퇴, 그리고 서구의 부상은 우연히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과 환경적 우연, 

또 각 지역의 상황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세계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사태를 이룬 것뿐이다.


18세기 후반 유럽과 아시아 각국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자연적 한계에 직면했다. 중국은 위기극복에 실패했지만

영국은 주변에 우연히 석탄과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혁명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중국도 석탄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석탄지대는 사람들의 주거지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반면 영국

은 가까운 곳에 풍부한 석탄이 매장되어 있었고, 이런 잇점이 두 국가의 운명을 갈랐다. 

영국은 석탄을 이용해 증기기관 동력을 만들어내고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만약 영국이 위치한 땅속에 석탄이 매장되

어 있지 않았다면 산업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엄청난 은광과 노동력이 풍부한 식민지가 없었다면 새로

운 경제체제를 만들어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이 산업혁명의 수단을 전쟁에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때, 아시아

와 유럽이 이루었던 세계의 세력균형은 유럽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석탄과 식민지가 없었다면 서구는 결코 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했다. 아시아에는 그 때 석탄과 식민지가 없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근대세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현상들은 한가지가 아니다. 여러현상들이 역사적 우연,사건,사태의 형태로  끼어 들었

다. 만일 그런 우연성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가 또 다른 역전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고)

1.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 로버트 B 마르크스 지음/ 사이

2. 우리눈으로 보는 세계사 1/  강철구 지음/ 용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