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오만방자하고 자기만 옳다고 우겨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가르켜 대본영 참모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대본영 참모들>이란 어떤 사람들이기에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런 비난을 받고 있는가?
이들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시기 일본 최고의 소위 '황군 엘리트'로서, 전쟁을 획책하고 지휘한 자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군대는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군대는 내정을 장악하고 부
족한 자원을 전쟁을 위해 동원했다. 그 군대의 핵심을 장악한 자들이 참모들이었다. 참모들은 상부의 불확대방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주사변, 노구교 사건, 장구펑 사건, 노몽한 사건등을 일으켜 일본을 끝없이 전쟁의 진흙탕속으로
몰고갔다. 그 끝은 제국의 파멸이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비록 물리적 환경은 다르지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본성은 유사하기 때문
이다. 이제 일본제국시절 참모집단을 분석함으로서 우리는 또 하나의 교훈을 음미하게 될 것이다.
일제 패망후, 도쿄 전범재판에 기소된 28명의 A급 전범들 중 참모 출신은 18명이었다. 교수형을 받은 7명 중 6명이 참
모 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문관출신이다.
1928년 관동군이 황구툰에서 장쭤린을 모살할 때부터 시작해 1945년 일제 패망때까지 일본이 개입한 전쟁을 살펴보
면, 그 전쟁들을 획책하고 적극적으로 확대하며 미친듯이 추진하다가 파멸한 배후에는 일본군 참모집단이 있었다.
영관급에 불과한 참모집단이 어떻게 군대를, 더나아가 정부를 좌지우지하며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조직의 통제기능은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참모집단은 왜 공세 일변도의 사고방식만을 고집했을까?
그 모든 근원은 1889년 만들어진 메이지헌법에 있었다.
이 헌법규정때문에 정부가 군을 통제하지 못하고(정치와 군사의 분리), 군정과 군령이 분리되어 참모본부(대본영)
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헌법 11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일본군의 통수권이 정부(내각)에 있지 않다는 것
이다. 당시 메이지 유신세력들은 자유선거로 구성되는 내각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의 통수권을 일왕에게 일
임했던 것이다. 또 내각 산하에 있던 육군성의 일개 국이었던 참모국을 독립시켜 참모본부로 만든 후, 일왕 직속으로
만들었다. 이제 일왕은 수상, 육군대신, 해군대신의 보필없이 참모본부를 통해 직접 군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군령을 주관하는 참모본부의 독립은 군정과 군령의 분리, 즉 정치와 군사의 분리를 의미했다.
전쟁은 정치의 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평상시나 전시를 불문하고 정략과 전략은 일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략을
주도하는 참모본부를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군정은 군사행정을, 군령은 작전과 용병등 구체적 군사행위를 담당하는 것인데, 일본제국의 이런 편제로 인해 군정
은 내각에 소속된 육군성과 해군성이 담당하고 군령은 내각과 무관한, 일왕직속의 참모본부(육군)와 군령부(해군)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 정부는 단지 모병과 양병에만 관여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군대가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하
는 지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은 야전 지휘관들이다. 이들 지휘관을 지휘하는 것은 참모본부(대본영)의 참모들이었다.
대본영의 참모들은 일왕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지만, 일왕은 전통적으로 사안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
다. 결국 모든 조건이 통제받지 않는 대본영이란 괴물을 만들었다.
제국시절 일본에는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군인이 담당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 제도때문에 내각은 군
부에 끌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군부가 내각에 불만이 있으면 두 군부대신이 사직하고 새로운 군부대신을 파견하
지 않았다. 그러면 육군성과 해군성이 공석이 된 내각은 붕괴되었다. 군부는 이런 식으로 내각을 길들였고 더 나아
가 암살과 쿠데타로 반대자들을 제거했다. 1930년대가 되자 아무도 군부를 막지 않았고 군부는 더욱 폭주하며 길
고 긴 전쟁으로 일본을 몰아갔다.
그럼 대본영 참모들은 어떻게 길러 졌는가?
일본군의 참모는 일종의 자격이었고 일본 육군 중에서 육군대학 졸업생만이 참모가 될 수 있었다.
메이지 시절, 일본군에는 우수한 참모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82년 참모양성을 위
한 육군대학(이하 육대)이 만들어졌다.
육대 지원자격은 성적이 상위 20%안에 드는 육사 졸업생들로 한정되었다. 육대는 1945년까지 60년동안 3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매년 평균 50명 정도를 뽑았다.
당시 일본군에는 계급정년을 채우고도 진급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육대출신들은 정년을 채우면 반
드시 진급했다. 육대출신은 10년인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10년이면 반드시 대좌가 되고 그 다음 장군이 되느냐 여
부는 각자의 처세에 달렸다는 말이다. 이처럼 육대출신들은 승진과 고과가 남달랐다.
그러니 육군은 육대천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휘관들 마저 모두 육대가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말
이다. 하지만 대본영(참모본부) 작전부는 육대출신이라도 아무나 가는 곳은 아니었다. 일본 육군이 가장 중시한 이
곳은 오직 육대의 군토구미출신 졸업생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육대 졸업생 중 성적 상위 6명은 일왕이 하사하는 군도를 받는다. 이 6명을 군토구미라 불렀다. 작전부는 이 중
성적 상위 5명만 들어갔다. 6등인 군토구미는 들어갈 수 없었다.
참모는 일본 육군의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그 중 으뜸은 단연 대본영 참모들이었다.
일본은 출신을 중시하는 사회다. 일본 육군내에서 육대보다 더 높은 학부는 없었으므로 일본 육군의 수뇌부는 자연히
모두 참모출신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참모만이 상층부로 올라갈 수 있는 조직이 되었다.
육대출신들은 몇가지 특징이 있었다.
먼저 자신의 재능을 믿고 남을 깔보는 안하무인적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을 하기 보다는 남의
과실로 돌려버린다.
그들의 자만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일본군 참모들은 견장에 리본 띠를 맨다. 장군도 리본 띠를 매
는 데 참모들과 색상이 달랐다. 하지만 참모출신 장군들은 참모 리본 띠를 달았다. 참모는 육대출신만 할 수 있는데.
장군은 비육대 출신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시야가 극도로 좁다는 것이다.
육대출신들은 대부분 사회나 정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 육군유년학교 출신들 이었다.
유년학교는 군부가 장교후보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학교로 각 학교당 50명을 선발하는
전원 기숙사 학교다. 졸업생들은 일반적으로 육사에 진학하며, 육사 상위권 졸업생들은 육대에 진학한다.
그러니 사회와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고, 그런 연유로 황당한 이론을 만들어 스스로 심취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육대의 교육제도 역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점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 일본은 육사,육대의 점수가 평생을 따라 다닌다. 하지만 점수가 만능이 아니라는 것
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이런 풍조하에서는 실전 경험의 가치에 큰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 성적이 우수한 자들만이
요직을 자기들끼리 회전문처럼 드나듬으로서 폐쇄성과 집단의 신조에 어긋난 것은 언급하지 못하는 금기가 생긴다.
또 적극적 공격정신과 정신만능주의를 강요한다. 이 역시 지나친 외통수들을 길러낸다.
전통적으로 일본군에는 병참과 정보, 무기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들은 작전과 정신만능주의로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풍조는 육대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메이지시대 군수뇌부들은 비육대출신들 이었지만, 선진전술과 무기체계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참모들의 전횡을
견제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참모출신들이 군수뇌부를 장악했고 이제 그들의 독주를 막을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본영 참모들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적에 대한 정보와 분석을 등한시하며 오직 공격과 정신만능을 강
조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웃음과 따돌림을 당했다. 전장에서 일본군은 보급부족에 시
달리며 낡은 무기와 빈약한 화력으로 버티다가 죽어 갔다. 패전이 거듭될 수록 더욱 정신력이 강조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후, 중일전쟁의 진창에서 일본은 여러번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참모집단은 이를 수용하
지 않고 결정적 한방으로 매듭지으려 했다. 결국 확전에 확전을 거듭하며 태평양전쟁 발발 5년째 일본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참고)
1. 대본영의 참모들 /위텐런 지음/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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