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에서 양반으로/ 권내현 지음/ 역사비평사/ 2014년 출간
허름한 초가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은 이들이 누가 있었겠는가
17세기 후반, 경상도 단성현에서 노비로 태어난 수봉은 자신이 일군 부를 사용해서 노비신분에서 벗어났다.
이후 200여년동안 그의 후손들은 지속적인 신분상승을 꾀하여 평민에서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갔다.
양반이 된 수봉의 후손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 갔던 양반들이 자신들의 가계를 더욱 화려하게 보이도록 조상
에 대한 기록을 윤색하는데 반하여 조상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외형상 새로운 양반
가계가 탄생했지만, 그것은 이 시대에서는, 개인 차원을 넘어선 사회구조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흔적 지우기는 완전하지 못했다. 호적상에 그 이전을 짐작할 수 있는 자취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
다. 더구나 호적들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살펴 본다면 수봉과 그후손들의 200여년에 걸친 삶의 흔적들을
어림할 수 있었다. 그 것은 사람답게 살려고 발버둥치던 개인들의 간절함이었고, 조선후기 신분제가 흔들리
면서 울려퍼지던 커다란 광음들의 기록이었다.
근대이후 신분제가 폐지되고, 신분관념도 사라져 갔다.
오늘날 우리들 중 자신들의 가계가 노비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혼쾌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선조때 양반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하천민들이었다. 그 하천민들 중 누가 허름한 초가에서 노비
의 자식으로 태어 나길 바랐겠는가. 그래서 많은 하천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
고 노력했다. 이 책에 소개된 수봉외에도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기꺼이 걸었다. 길이 넓어 질수록 견고한 신분
제는 더욱 더 요동을 쳤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을 부정하고 잊었다. 이역시 수봉가만이 아닌 한국
의 많은 가계들이 걸어온 길이다.
한편으로는 미화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망각되어 가는 조상이상으로 후손들이 맞닥뜨린 현실도 결코 녹록
하지 않았다. 기회의 균등은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했고 교육에 대한 접근은 쉬워졌지만 학력을 통한 상승
욕구는 더욱 끓어오르는 것이 작금의 한국사회다.
그럼에도 그 내부에서 경제력과 학력이 서서히 특권화되고, 대물림되어 신양반층이 형성되고 있는조짐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자들에게 신분상승의 사다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그 사다리에서 떨어진
자들과 후손들은 또 다시 수봉가와 같은 전철을 밟아야 할까? 수봉가의 후손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것이 현
실이 되지 않고 그저 흘러간 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랄것이다.
조선시대의 호적은 방대한 양이 작성되었지만 남아있는 문서는 그리 많지 않다. 조선은 3년에 한 번씩 호적
을 조사해서 보관했지만, 연구자료로 쓰기에는 보존된 양이 적고 기간이 단락된 경우가 많다. 저자는 그런
불리한 여건 속에서 17세기이래 경상도 단성현의 호적을 조사하여 노비였던 수봉가의 200여년의 장정을 정
리했다.
그 시대는 조선후기로 신분제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시기였다. 비록 수봉가가 걸어온 길이 체제에 대한 저항
이 아니라 동화의 과정이었지만, 그 삶속에서 부딪쳤던 여러 신분층 사람들의 민낯을 드물지 않게 보여주는
재미도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던가. 그 말은 시대가 어떠하든 사람들의 경향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200여년에 걸친 시간의 무게가 녹록하지 않음을 느낀다.
200쪽에 불과한 적은 양에, 생각을 요구하는 묵직한 논제도 없다. 글들은 매끄러워 책장이 바로 바로 넘어
간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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