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정병준 지음/ 돌베개
해방공간사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김수임과 함께 한국의 마타하리, 이중간첩, 여간첩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입담속에서 소비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식민과 분단, 전쟁의 굴곡진 근현대사속에서, 나름의 소신과 의지를 가지고 이 땅의 해방과
한국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 왔던 그녀의 운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며
살아왔던 삶에 대한 댓가는 거친 시대가 남긴 상처라기에는 너무나 가혹했고, 그녀에게 덧씌워진 스파이라는
오명은 비극을 우화로 만듦으로써 그 치열했던 삶에 대한 모욕적 기억만을 남겼다. 그리고 비극적 진실이 전
하는 발현되지 못한 역사의 가능성과 교훈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이 책은 한장의 낡은 사진에서 시작한다. 1921년 상하이의 어느 이름모를 곳에서 19명의 젊은 남녀들이 사진
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11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들은 양복과 중국옷으로 정장을 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세를
취하며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끼었다. 이 사진속의 인물들 중에는 훗날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의 주역이 된 박
헌영과 주세죽이 있었다. 그리고 외진 곳에 이 책의 주인공인 현앨리스와 그녀의 동생인 현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저자는 이사진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앨리스 가족과 박헌영의 인연에서부터 말이다.
현앨리스의 아버지인 현순은 1903년 하와이 이민배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떠났다. 개신교 목사가 되어 가족
들을 부양하던 그는 1907년 귀국하여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자로 재직하는 등 한국 교계에서 명망있는 인사
로 자라났다.
1919년 3.1운동 직전, 현순은 돌연 상하이로 망명하여 3.1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미국에 전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0년에는 워싱턴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상하이로 돌
아와 1923년까지 머물렀다. 이 시기 상하이는 민족주의 와 독립운동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곳이었다.
그 열기를 쫓아 뜻있는 한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그 속에 박헌영도 있었다. 이렇게 박헌영과 현순 가
족,현앨리스는 만났다. 후일 북한의 박헌영 기소장을 보면 현앨리스가 이 때 박헌영의 첫 애인이었다고 나오
는데 사실관계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박헌영은 상해에 와서 주세죽과 곧 열애에 빠졌고 1921년 그녀와 결혼
했다. 현앨리스는 1920년 5월 상하이에 도착했고, 1921년 일본으로 유학가서 정준이라는 남자를 만나 1922
년 결혼했다고 나온다.
현앨리스의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끝났다. 1923년부터 별거를 시작한 후 1927년 이혼하고 말았다. 이혼후 하
와이로 돌아와서 유복자를 낳았다. 불행했던 가정사와는 별개로, 이시기 그녀의 행적은 일제 사찰 기록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기록을 보면 그녀는 상하이, 일본, 불라디보스톡등을 왕래하며 사회주의자들과 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밀결사의 특성상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그녀가 사회주의 지하
조직의 비밀임무를 띠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흔적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3.1운동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그들을그토록 흥분시켰던 민족자결주의와 그에 기반한 외교독립노선은 허
상이었음이 드러났다. 허지만 곧바로 공산주의의 열풍이 더 크게 불어닥쳤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공은
상하이의 젊은 민족주의자들을 사회주의에 공명하게 만들었다. 현앨리스도 그 뜨거운 분위기 속에 빠져들었
고, 이 것은 그녀에게 깊이 각인되어 이후 그녀의 삶을 결정했다. 그 열기속에는 그녀의 가족들도 있었다. 목
사였던 아버지 현순과 동생이었던 현피터의 행로도 바뀌었다. 이후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한인사회에
서 가장 급진적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현피터는 노조운동과 미국 공산당에 관련되었고 1950년대 매카시즘이
극성을 떠는 와중에서 국외 추방의 공포에 시달렸다.
3.1운동 이후 상하이 한인사회의 혁명적 분위기와 시대정신은 그 곳에 있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이 후, 그
것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한 시대의 트렌드를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사는 거듭해서 보여주고
있다.
현순은 1923년 하와이로 돌아왔고, 현앨리스도 1924년에 뒤따라 들어왔다. 현순은 하와이에서 목회를 운영하
며 비교적 평탄한 여생을 보냈다. 반면 현앨리스는 유복자를 낳고, 대학을 다니고, 하숙을 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현앨리스 남매는 미 육군에 입대해 복무했다. 현앨리스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
영어를 구사했다. 따라서 미 육군내에서 번역,통역에 관련된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10월에는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되었다가, 그해 12월 서울로 전근되어 주한 미24군단 정보참모부 산하 민간통신
검열단에 배치되었다.
민간통신 검열단은 민간의 편지, 전화, 통신을 검열 또는 감청함으로써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다. 서울,
부산,광주에 3개 지구대를 운영했으며 서울에서는 매달 약55만건, 부산에서는 약 13만건의 민간 우편과 통신
을 검열했다. 특히 주요 정치인, 정당 및 제 사회단체간에 오가는 우편,통신물은 반드시 검열했다. 이를 바탕
으로 정보공작을 펼쳤는데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46년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보낸 개인 편지를 공개한 사건이
다.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개인 편지를 보내 박헌영체제를 비판했는데, 미군정이 이를 우익신문에 유포해 버리
자, 공산당을 탈당해야 했다. 이런 주요한 정보부서의 서울지구대에 현앨리스는 인사를 담당하는 민간요원
과 부책임자로 발령받았던 것이다.
1946년 5월 방첩대는 서울 조선공산당 본부를 급습해 다수의 문서를 확보했다. 이들 문서에서 현앨리스가 조
선 공산당과 접촉했으며 박헌영과 만났다는 분명한 증거가 발견되었다.
최근 공개된 미 방첩대 문서를 보면, 현앨리스는 주한미군내 공산주의자들을 조선공산당과 연결시켜 주었고,
이들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에서 발행된 공산주의 문건들을 전달해주고, 조선공산당의 홍보물을 미국내에
반입시켜 반군정,반우익 여론을 조성했으며 조선공산당과 미국공산당을 연결시키는 가교노릇을 했다는 것이
다.
한편 그녀는 검열단 내에서는 한국인 고용원 49명을 고의적으로 해임하고 북에서 내려온 26명을 고용하여, 검
열단의 임무를 파괴하는데 거의 성공했으며, 이후 그녀가 해임되고 나서야, 기능이 점차 회복되었다고 적혀있
다. 심지어 그녀의 직속상관은 현앨리스가 그들의 임무를 망친 악마라고 표현했다.
미 군정은 즉각 현앨리스를 해임하고 미국으로 추방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급
진적 신문인 <독립>의 편집과 운영에 참여했다. 1943년 창간된 주간지인 <독립>은 김원봉이 이끄는조선민족
혁명당의 미주지부 기관지로 당시 재미한인 진보진영에서 가장 급진적 논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독립>의 논
조는 반 미군정, 반 우익, 반 이승만, 친 좌익, 친 북한이었고 운영진 대부분이 사회주의에 공명하고 있었다. 이
신문의 편집, 운영에 관여하던 현앨리스는 1949년 홀연히 체코로 떠나더니, 그곳에서 이경선(이사민)과 함께
그해 11월 북한으로 들어갔다.
북한으로 들어간 현앨리스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조선여성> 1950년 4월호에 <미국의 노동
여성들>이란 글을 현미옥이라는 이름으로 쓴 것이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3년뒤, 그녀는 북한의 재판정에 다
시 현앨리스란 이름으로 소환되었다.
1953년 8월 북한에서는 소위 <이승엽,이강국등 반당,반국가적 간첩 도당들의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현앨리스의 이름은 이 재판과정에서 처음으로 거론되었다. 미국 정탐기관의 지령으로 파견된 현앨리스가 19
50년 7월 이강국을 만나 군사기밀 제공을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1955년 12월 박헌영 재판과정에서도 그녀는 등장했다. 여기서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라는 혐의의 핵심 근
거로 중요성이 더욱 커져 있었다. 기소장에서 그 부분을 읽어 보자.
.....박헌영은 1948년 6월 현앨리스를 비롯한 미국 탐정을 구라파를 통해 북조선에 파견하겠으니그들의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라는 하지의 지령을 접수하였다. 그는 1949년 봄에 정치적 망명자로 가
장하고 미국으로부터 체코에 잠입한 간첩 현앨리스와 이사민에게 외무부의 직권을 이용하여 입국사증
을 발급케 하여 이들을 입국시킨 후 중요한 기관의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의 간첩활동을 보장하여 주었
다.....
기소장에는 박헌영과 현앨리스의 관계를 " 박헌영이가 1920년도 상해생활에서 조선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
지고 기독교 신자이던 현앨리스를 자기의 첫 애인으로 했다고 기록하여 둘 사이가 간첩망 내의 단순 연락관계
를 넘어 그가 현앨리스에게 연정을 품고 농락당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은 승리했다고 주장했지만. 얻은 것은 없는데 국토는 폐허가 됐고 수백만명이 죽거나 불
구가 되었다. 인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 책임은 남침을 가장 적극
적으로 선도했던 박헌영일파가 져야 했다. 김일성파는 물론 소련파, 연안파도 동조했다. 1950년대 공산진영
에서 정적을 숙청할 때 간첩 혐의를 씌우는 것은 상례였고 박헌영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미국 극비문서를 살펴봐도 현앨리스가 미국 간첩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일제와
미국 기록을 살펴보면 그녀가 일관되게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한
의 재판과정에서도, 주요한 증인인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재판을 받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 판단하면, 현앨리스는 1953년 2-3월 남로당 주요간부들에 대한 대대적 검거 와중에
서 체포되었을 것이다. 이들 중 박헌영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1953년 7월에 기소되었고, 박헌영은 1955년 12
월에 기소되었다. 주요한 증인인 현앨리스는 적어도 1955년도까지는 공식적으로 처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임을 입증하기 위한 북한의 강압적 심문과 고문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과
정에서 죽음를 당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녀의 마지막에 관해 알려진 정보는 없다.
1949년 미국을 떠난 현앨리스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에서 현앨리스를 주목하게 된 것은 2002년이다. 그녀의 막내동생인 현 데이비드가 한국에서 자신의 가족
사를 책으로 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은 그녀의 굴곡진 삶과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에는 관심이 없었
다. 언론은 그녀를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렀다. 이 후 그녀는 김수임과 더불어 대표적인 여간첩, 이중간첩, 마타
하리등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그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북한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남한에서는 한국판 마타하리로 왜곡된 그녀의 삶을 정병준은 시간과 공간을 넘
나들며 복원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와 자료의 부족으로 아직도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선택이 어떠했든, 이제는 암울한 시기 민족해방과 더 나은 한국인들의 삶을 갈망하고, 그 것을 위해 행
동했던 한 인간의 삶을 복원하고 그 인간앞에 진혼주 한 잔 정도는 올릴 수 있는 시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상하이에서 평양까지 줄달음치며 역사와 자기운명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여자, 이상주의자이자 비현실적 낭
만주의자, 일본인이나 미국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상실한 고향을 찾아 헤메는 방랑자.. 그녀는 깃들 곳을 찾아
북한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 곳은 그녀가 깃들고자 했던 이념과 사상의 조국이 아니었다. 북한은 그녀를 이질
적 존재이자 위험요소로 간주했고, 그녀를 통해 박헌영일파를 미제의 스파이로 규정한 후 제거했다.
그녀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상과 고향을 추구했지만 그 어느 곳에도 깃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했다. 그 것이 그녀가 마주친 한국 근대의 종착점이었다.
일본 제국의 신민,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 중 그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질적이고 위험한 존재,
결국 어디에도 귀속할 수 없는 그녀의 정체성과 부동하는 경계적 삶이 그녀에게 스파이의 굴레를 씌웠다. 일제
에게는 그녀는 위험한 좌익 혁명분자였으며 미군정에게는 좌익과 연루된 악마적 존재였고, 북한에서는 미제
의 간첩으로 낙인찍혔다. 한국 근현대사의 경로는 그녀의 한 몸에 이처럼 다중적이고 역설적인 정체성을 강요
했다. 현앨리스를 투과한 근현대의 빛은 공존 불가능한 극단적 스펙트럼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한국 현대사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찼던 한 여성의 치열했던 삶을 한갓 스파이물의 가쉽거리로 마멸시켰지
만, 이 땅 어디에도 그녀를 기억시켜 줄 작은 묘비명 하나 허용하지 않았지만, 미래의 한국은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좀 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가지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현앨리스의 다른 가족들도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현순은 196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국정부
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국립묘지에 안장시켰다.
현앨리스의 아들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정웰링턴은 체코로 망명해서 의사로 근무하다 1963년 자살했다. 36세
였다. 동생인 현피터는 1950년대를 휩쓴 매카시즘 광풍속에서 시달리다 이혼당했다.
그녀와 <독립>을 함께 운영했던 급진주의자들인 김강, 곽정순, 이춘자, 전경준등은 북한으로 추방당한 뒤, 소
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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