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사

중국 매국노의 대명사 왕징웨이(왕정위) 평전

정암님 2015. 3. 28. 19:32


그는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그가 한 번 입을 열면, 그의 논적들은 할 말을 잃었고 대중들은 열광했다.

또한 학문과 시서에도 빼어났다. 그의 우국충정이 절로 우러나오는 문장을 읽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는자가 

없었다. 인품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가 일본의 괴뢰인 난징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에 앉았을 때에도, 돈과 재물

을 탐하지 않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마약과 도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왕징웨이(왕정위)다. 장제스, 마오쩌둥, 장쉐량과 함께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명으로서, 

중국의 이완용이라고 불리는 중국 매국노(한간)의 대명사다. 그런 그도 한 때는 우국충정에 불타, 쑨원과 함께 

조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려고 온 몸을 던졌던 사람이었다. 그 시절 그는 누구보다도 존경받았고, 영향력 있

었던 혁명 1세대였다.


1895년 광저우 봉기에 실패한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5년 쑨원은 도쿄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을 모아 반청,

반외세를 표방한 중국혁명동맹회(이하 중국동맹회)를 결성했다. 여기에 열혈청년이었던 왕징웨이가 참여하여,혁

명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진벽군은 1891년 말레이지아의 부유한 화교가정에서 태어 났다. 그녀는 15살 되던 해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다.

왕징웨이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그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 


왕징웨이를 전국적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것은 순친왕 암살시도 사건이었다.

1909년 왕징웨이는 청나라 순친왕을 암살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났다. 진벽군도 그 암살단에 자원해서 함께 떠

다. 하지만 암살시도는 실패하고 왕징웨이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년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그는 

풀려났다.

 

모든 것이 찰흑같이 어두웠던 그 기간동안 진벽군은 꿋꿋하게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애절한 사랑에 감동

한 왕징웨이는 곧 그녀와 결혼했다. 

진벽군은 죽을 때까지 그만을 사랑했다. 왕징웨이가 조국을 배신해도, 그녀는 이해했고, 그가 죽은 뒤에도 왕징

웨이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진벽군은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마오쩌

둥은 그녀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인민에게 사죄한다면 사면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진벽군은 자신과 자신

의 남편은 죄가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1959년 그녀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곁가지 이야기지만, 왕징웨이가 매국노인 것과 상관없이, 진벽군과의  러브스토리는 유명하다.


왕징웨이는 석방된 후, 쑨원의 오른팔이 되어 위안스카이를 상대로 한 혁명전쟁에 앞장서며 국민당내 주요 요직

을 거치며 단숨에 쑨원 다음의 2인자가 되었다. 


청조를 멸망시켰지만 중국은 분열되어 도처에서 군벌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1925년 쑨원은 끝내 중국통일의 대

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쑨원의 장례식을 주관하며 왕징웨이는 자신을 후계자로 각인시키려고 애썼

지만 국민당내 파벌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군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왕징웨이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황푸군관학교 교장이며 군부에 상당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장제스

였다.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손을 잡고 국민당내 파벌들부터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1925년 파벌들을 정리하고 광저우에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 주석은 왕징웨이가 되었고, 장제스는 7명으

구성된 군사위원회 위원이자 광저우 위수사령관 겸 제1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까지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한낱 부하로 여겼을 뿐,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 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욕이 강했던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거세할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1926년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공산

당원들과 손을 잡고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왕징웨

이를 추방했다. 쫓겨난 왕징웨이는 프랑스로 망명길을 떠났고 국민당의 당권은 장제스의 손아귀로 굴러갔다.


이 사건은 평생에 걸쳐 반복되는 두 사람의 악연의 시작이었다. 둘은 서로 필요할 때는 손을 잡았지만, 다시 반목

하고 충돌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왕징웨이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면서 둘 사이의 불신과 적개심은 깊어져갔다.

그 적개심이 더욱 더 두 사람의 권력욕을 부풀어 올렸고 혁명가로서 모습은 점점 사라지게 만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래, 일본은 끊임없이 중국 땅을 쳐들어 왔다. 중국군은 연전연패였다. 장제스는 정면대결은 

불리하니 중국의 넓은 토와 인구를 이용, 일본군을 끌어들여 지구전과 장기전으로 적을 소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드넓은 영토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고, 셀 수 없는 민초들이 학살당했다.

중국군은 때로는 영웅적으로 분전했지만, 상당수 전투에서는 맥없이 무너졌다. 패배감과 무력감이 많은 이들을

감쌌다. 왕징웨이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1936년 시안사변이후 구성된 거국내각에서 행정원장 자리에 복귀한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전략을 불신하고 패

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국민들이 당장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일본과

의 전쟁을 주장하지만, 중국이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 없는 이상 우리 역량부터 키워 실력을 충실히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실력을 배양할 때까지 중국의 주권을 유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

는 비록 굴욕적이지만 일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일본과 화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굽은 길이지만 진정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곡선구국(曲線救國)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의 저자세외교는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국이 저자세로 나올수록 일본은 더

욱 더 기고만장해졌고 요구조건은 더욱 더 많아졌다. 


왕징웨이같이 이상이 높고 자부심이 강한 자들중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인정

한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자기 생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된 길에 더욱 매

달리고 호도하려 든다. 안타까운 일이다. 왕징웨이 역시 마찬가지 였다. 그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려 하지 않

았다. 오히려 교섭과 저항을 동시에 하려고 했기 때문에 둘 다 실패했다며 궤변만 늘어놓았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론을 지지하고 일본의 지도아래 단결하여 영미 백인 지배를 끝장내야 한

고 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중국인민들의 분노를 샀다. 1935년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는 세발의 총탄을 맞

다. 그중 한발은 척추주변에 맞았는데, 이때문에 십여년뒤 그는 골수 종양으로 죽게 된다.


1938년 11월 상하이 중광당에서 일본과 왕징웨이 사이에 중광당 밀약이 체결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일 방공협정의 체결과 내몽골과 베이징-텐진 지구에 대한 일본군의 주둔을 인정한다.

2. 일본인의 중국 내륙 거주 및 영업의 자유를 인정한다.

3. 만주국을 승인한다.

4. 경제 제휴에서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화북에 대한 개발 및 이용에서 특별한 편리를 제공한다.

5. 일본은 중국에 대해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중국은 일본 거류민이 입은 피해를 보상한다.

6. 일본군은 2년이내에 현재 점령지구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한마디로 베이징-텐진 지구 포함해서 그 이북지역은 일본에 할양하고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킨다는 말이다.

1938년 12월 왕징웨이는 가족과 소수 측근들을 데리고 충징을 빠져나와 일본 점령지인 상하이로 도주했다. 

1940년 3월 난징에서 일본의 괴뢰정부인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되었고, 왕징웨이는 주석대리및 행정원장 

자리에 앉았다. 그 직후 도쿄를 방문하여 중광당밀약에서 그가 가장 중시했던 중국 주권의 존중과 일본군의

수 약속 이행을 재차 요구했지만, 일본은 대답을 회피한 채 얼버무렸다. 일본에게 중국 주권을 보장받고 대

등한 입장에서 친선관계를 맺겠다는 것은 그의 바램일 뿐이었다.

 

일본에게 그는 중국을 분열시키고, 점령지역의 통치에 써먹기 위한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또한 일본이 사실상

그의 통치구역으로 인정해 준 지역도  난징,상하이를 중심으로한 양쯔강 하류의 좁은 구역에 불과했다.

푸대접을 받을수록, 왕징웨이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건설 주장에 더욱 매달렸다. 그는 이 것이 쑨원의 대아시

아주의 유지를 잇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힘없는 자의 발버둥에 불과했다.

힘있는 일본이 힘없는 중국을 새삼스레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그동안 빼앗은 것을 돌려줄 리는 없었다.

명색이 중국을 대표하는 정치 원로이자 지성과 학식을 갖추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정치가였던 그가 그 정

도의 사실조차 몰랐을까... 알았을 것이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장제스의 장기전과 지구전, 그에 맞서는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과 약탈, 학살 사이에서 주변지역 민초들이 

비참한 삶을 연명하고 있을 때, 그가 지배하던 지역은 기본적인 생활은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저 자신들

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나라를 내다팔고, 민초들의 고혈을 무자비하게 빨아댔던 한국의 친일 매국노들 보다는 

좀 더 낫다고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1944년 왕징웨이는 골수종양이 악화되어 일본 나고야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일본이 패망한 후

인 1946년 1월 난징을 접수한 국민군은 난징 교외에 있던 그의 견고한 무덤을 폭파하고, 사체를 끄집어 내어 

불에 태운 후, 재는 바람에 흩뿌렸다.


해방후, 중국은 1947년 말까지 군인을 제외하고 3만 828명을 한간죄로 기소하고, 그중 15391명이 형을 선고받

았다. 군인은 군법에 의해 더욱 엄중하게 처벌되었다. 친일 정권의 수장과 성장급, 군 수뇌부는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곧이어 발생한 내전으로 친일파(한간)에 대한 처단은 흐지부지되었고 그 기록조차  제대로 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적어도 한간들이 복권되어 국가의 권력층에 재진입하지는 

했다. 즉 일본인들과 한간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정치, 경제, 사회 구조는 확실히 청산될 수 있었다. 


참고)

1.중일전쟁/ 권성욱 지음/ 미지북스

2. http://blog.daum.net/shanghaicrab :중국, 북경, 장안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