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조선 사족(양반)들의 백성들에 대한 상반된 시각(계층 우월성/ 민본론)은 어떤 논리구조에서 나왔나?

정암님 2015. 10. 7. 21:39


조선의 사족(양반)들은 백성들과 자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이 인륜이라고 주장

했다.


사족들은 차별의 근거를 인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 학습능력의 차이나 도덕적 품성의 차이에서 발견하고

자 했다. 일찌기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기질지성의 차별성을 계층의 차별성과 연관시키고자 했다. 조선사회

는 이런 논리에서 반상간의 계급적 차별성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구했다.


"하늘이 백성을 낳을 때부터 이미 인의예지의 성을 주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기질을 받는 것은 고를 수 없는 일

다. 때문에 모두가 그성을 알아서 온전하게 할 수는 없다. 총명하고 예지로와 능히 그  성을 다한 이가 그 가운

데서 나오면 하늘이 반드시 명하여, 수많은 백성들의 임금과 스승으로 삼아, 그들을 다스리고 가르쳐서 그 성을 

회복하게 하신다."

주희가 <대학> 서문에서 한 이 말을, 사족들은 치자집단의 평민층에 대한 통치권과 교화권 인정으로 해석했다.


사족들은 조선조 전시기동안 자신들이 평민층에 대한 교화권을 행사할 충분한 권한과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장했다. 이런 사고는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라는 유가 특유의 풍교론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

은 평민들은 스스로 사리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학습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우민관적 시각을 보여준다.


백성들을 우민으로 보는 것은 조선조 사족들의 공통적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을 농노 상태의 일방적 종속

로 보고 무조건적 착취와 복종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다. 평민들에게도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정한 동의

와 이해를 구하는 교화적 행정을 펼쳤던 것이다. 즉 유교 이데올로기를 같이 수용하고 내면화하는 대상으로 인식

한 것다. 이점에서 유교적 관료제는 사(士),관(官) 일치와 사(士),농(農) 일치의  기본적 소통구조를 가지고 있

었다.


이런 구조를 띠게 된 이유는, 백성들의 자발적 동의와 신탁이 왕조유지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런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교육과 민본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사족들은 "백성은 사직이나 임금보다 더 중요하며, 백성의 신탁을 얻어야만 천자가 될수 있다"라는 민본적 주장

이나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것으로부터 보고, 백성들이 듣는 것으로부터 듣는다"라는 천명론을 주요 통치 이데올

로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도전은 "백성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서 속일 수 없다. 그들의 마

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지만,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배반하고 복종하는 사이는 털끝만큼의 간격도 없다,"

라고 할 정도로 민심의 향배를 중시했다. 이처럼 사족들의 민본주의적 태도는 백성들에 대한 교화책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교화를 통한 위민정치의 실현, 이것이 유가들이 꿈꾸는 도학정치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백성은 교화의 피동적 객체가 아니라, 교화를 통해 인격적이며 도덕적인 품성을 계발할 수 있다는 주체적

의미도 포함된 백성이다. 또한 교화는 양자간의 상호호혜적, 쌍무적 성격을 지닌다.

"백성은 세금으로 치자를 봉양한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기를 봉양해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도 중요한 것이다."라는 정도전의 말은 이를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유가들의 백성들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사족들에게 백성은 국가의 근본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스스로 교화의 주

체가 될 수 없는 어린 아이와 같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따라서 사족들은 학문과 교화를 통하여 이들 백성들을 보

할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조광조는 이 것을 이렇게 정리한다. 

선비가 세상에 나서 학문으로 업을 삼는 것는 그 가슴에 품은 바를 펴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서 라고 말이다. 조선조 사족들은 이처럼 백성들에 대한 교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향촌에서는 자치적 교화 

을, 중앙에서는 경세적 민본주의정책을 펼쳐 나갔다. 비록 그 시작과 끝이 같지 않았지만, 봉건시대 지배집단이

지배층의 입장을 이처럼 고려한 경우는 세계 역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참고)

1.서원의 사회사/ 정순우 지음/ 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