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사림파가 추구했던 정치는 공론정치였다.
공론 정치란 유림의 공론에 따라 정치와 사회를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조 성종시기,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그들은 공론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경주했다.
공론정치는 언론,사정기관인 삼사, 즉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권력의 중요 축으로 기능하게 했다. 삼사의 관원이
라면, 심지어 하급관료라 하더라도 고위관리, 나아가 국왕까지도 극렬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압의 차단을 위한 인사권 독립과 강한 연대의식이 필요했다. 사림이 처음 중앙정계로 진출한
후 선조때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백여년동안 사림은 삼사의 인사권 독립과 강한 유대감을 구조화할 수 있도록 집
요하고 끈질기게 추구해 나갔다.
하지만 그 기간은 사림에게는 고난과 피바람의 연속이었다. 국왕과 훈척의 분노속에 사화가 연거푸 일어났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와중에서 사림은 때론 움크리며 눈치를 보면서도 이미 쟁취한 삼사의 권
한은 끝내 놓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회가 올때마다 삼사의 독립성을 신장시켜 놓았다. 그것이 마침내 사림파
에게 권력을 안겨주었다.
이렇듯 삼사의 독립성과 비판정신은 사림파가 훈구세력과 백여년간 대항하면서 만들어낸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
는 정상적인 관료제하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구조로 중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
도로 조선의 특징적 현상이었다.
16세기 들어 과거제가 깊이 뿌리내림에 따라 독서인층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가치관이 널리 퍼지
면서 도덕적 자의식이 강한 사족들의 정체성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었다. 이시기에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들은 성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나갔다. 그 와중에서 청요직연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
었다.
청요직아란 홍문관,사헌부,사간원등 언론담당 관료들과 이조와 병조의 낭관, 의정부의 사인,검상등 인사담당 관료
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래 조선 조정의 서열 구조는 왕-대신(정승,판서)-중,하급관료로 이어지고 있었다. 15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청요직들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국왕이 대신들과의 공고한 유대를 통해 국
정운영을 독점하고 있는 데다, 청요직들간에도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종이 즉위하자, 분위기
가 바뀌기 시작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청요직에 포진한 사림파들을 우대했고 그들이 국정현안에 홍문관과 대간의 언론
을 통해 참여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이시기 청요직들은 도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도학적 시각으로 불합리한 국정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 지향점은 도덕적 가치가 구현
되는 사회였다.
도학정치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공론정치가 실현되어야 했다. 공론정치를 위해서는 기반이 되는 시스템이 구비되
어야 했다. 그 시스템의 골격은 언론기관인 삼사의 인사권 독립과 청요직들의 강한 연대감이었다.
이시기 사림파들은 홍문관을 중심으로 순환인사체계를 구성하고, 서경,피혐같은 관행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청
요직에 대한 인사권의 일부를 확보했다. 홍문관의 하급관료들은 사헌부,사간원을 거쳐 다시 홍문관의 고급관료로
돌아오거나, 이조,병조의 전랑이나 의정부의 사인,검상으로 진출하곤 했다.
또한 <홍문록>,서경,피혐등의 관행을 활용, 청요직 인선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장치들을 확보해 나
갔다. <홍문록>은 동료 평가에 기초한 홍문관의 자체적인 인선 명부로, 동료들의 평판이 인선에 직접적 영향을 미
치게한다. 서경은 대간에서 5품이하 관직에 임명된 관료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을 말하는데 성종대부터 당사자
의 명망과 도덕적 흠결 여부까지 평가에 포함시켰다. 만일 부적합 판정이 나오면, 그에 대한 서경을 거부함으로써
임명을 철회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피혐은 어떤 혐의를 받은 관료가 사직을 요청해 국왕의 처치를 받는 것을 말한
다. 대간은 부적합한 사안에 대해 사직을 청함으로써 특정 안건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홍문록>, 서경, 피혐등은 국왕과 대신들의 부당한 인사나 압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는 수단이었다. 이는 다
른 한편으로 청요직 관료들에게 스스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원칙에 충실하도록 압박하는 자기통제 수단으로 작용
했다. 관료들의 출세에 자신의 도덕적 평가가 중요해짐에 따라 청요직들은 업무능력뿐 아니라 도덕성까지 적극적
으로 의식할수밖에 없었다.
도학 이데올로기와 삼사의 인사권 관행이 변함에 따라, 청요직들은 삼사의 언론을 통해 기성 권력을 향해 거침없
는 비판과 견제를 날릴 수 있었고, 청요직 연대는 한층 더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마침내 "신하의 도는 의(義)를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종 24년 홍문관원
성세명)라는 말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시기 청요직들의 강경한 언론 행사는 다음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어떤 사안에 대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수차에 걸쳐 허락을 구한다. 그래도 수용되지 않으
면 양사가 합사해 압박을 강화한다. 이와는 별도로 경연에 참가한 대간이 이 문제를 거론하고, 함께 한 홍문관원들
도 경전의 근거를 들이대며 거든다. 이후에도 몇 달에 걸쳐 대간들이 계속 주청하고 홍문관은 같은 논조의 상소를
올려 압박한다. 끝내 허락받지 못하면 사관이 논평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이를 비판하는 기록을 남긴다.
때로는 국왕이 분노해 대간 전체가 교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인사들도 이전 대간의 주장을 이어 가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 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갔다. 간혹 대간이 왕의 위세에 눌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면 홍
문관에서 대간을 논박하기도 했다. 그러면 대간들은 사직을 요청했고(피혐), 사직이 허락되지 않으면 그 안건을 재
개했다. 만일 체직되면 새로운 대간들이 그 안건을 재개하는 일이 많았다.
성종연간 청요직들은 홍문관을 중심으로 상호연계되는 자율적 인선 체계를 구축하고 청요직 연대를 만들어 나갔
다. 그 기초위에서 삼사의 언론은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상황에 따라 피혐,서경, 사관의 논평등
의 관행을 섞어가며 자신들의 주장이 강력하면서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밑바탕에는 성리학
적 이상의 구현이라는 공통된 사명감과 도덕에 대한 지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국왕과 훈척들의 반발을 불렀고, 그 댓가는 4차례의 피바람이었다. 숱한 사림들이 처형되
거나 유배당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제거되자, 다시 짧지만 굵었던 봄날이 왔다. 훈척들에게 시달리던 중종
은 사림파들을 불렀다. 중종11년(1516년) 이조전랑에게 자대권(후임 전랑 추천권)과 통청권(삼사의 당하관 추천
권)이 주어짐으로써 사림파들은 부분적으로 장악했던 청요직 인사권을 마저 거머쥐었다. 조광조일파가 적극적인
개혁을 추구해 나갈수 있었던 것은 청요직 인선권을 쥔 전랑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봄은 짧았다. 도학정치의 꿈은 무너졌다. 조광조는 한적한 시골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다시 훈척들이 날뛰는 세상이 되었다. 훈척들은 청요직 연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취약한 정치기반에서 구
태여 무리수를 두려 하지는 않았다. 청요직들도 숨을 죽였지만, 이미 확보한 시스템은 악착같이 지켜냈다. 새로운
봄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마침내 선조대 사림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청요직연대에 기반한 공론정치가 다시 재
개되기 시작했다.
사화의 시대였던 16세기, 부패와 탐욕으로 가득찬 훈구의 무리들과 독단을 왕의 권리라고 착각한 폭군이 만들어낸
황량한 대지에서 성리학적 이상과 도덕정치를 꿈꾸었던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역사는 그들을 사림파라고 불렀고
그들은 거친 대지위에서 자신들의 꿈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 갔다. 그 와중에서도 정치구조는 변화되고 있었고, 사
족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은 심화되어 갔다. 새로운 조선이 탄생하고 있었다. 15세기의 조선과는 매우 이질적인
새로운 조선은 공론정치를 통해 군신공치를 실현시켰다. 그 기반은 그들이 100여년동안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언
론의 독립성확보였다.
추가) 새로운 조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조선이 양난을 극복하고 500여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공론정치
의 힘이 컸다. 절대왕정체제의 최대 취약점은 군왕의 능력에 체제의 효율성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왕정은 장기적으로 보면 시스템이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 단명으로 끝났다.
2000년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한 국가가 비교적 오래 유지하는 경우는 거의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잘 이루어진 경우
였다. 또한 그런 체제에서는 민생 역시 비교적 무난한 편이었다.
참고)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문사철 편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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