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조선시대 설립된 서원 수는 얼마나 되나?

정암님 2015. 12. 28. 02:48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자가 있다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지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도둑의 소굴이 되었

             으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고종2년(1865년) 대원군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던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헐어버렸다.

이어 고종5년 미사액서원들을 헐어버리고, 고종8년 사액서원중 47개소만 남기고 나머지 사액서원들을 모두 훼철

시켰다. 이 기간동안 철폐된 서원이 약 700 여개라고 하나 정확한 숫자는 알 길이 없다. 


최근 윤희면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세워진 서원의 총 숫자는 대략 1700여 개 정도라 하며, 이 숫자는 학계

에서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한다.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서원,사우의 시기별 숫자>  출처:<조선시대 서원과 양반>115페이지/ 윤희면 저


중종

명종

선조

광해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미상

합계

서원

1

(100)

16

(100)

70

(72.2)

35

(83.3)

33

(50)

31

(73.6)

48

(65.8

175

(48.2)

8

(24.2

50

(23.1)

47

(38.5)

52

(28.9)

12

(26.1)

19

(35.8)

1

(14.3)

82

(22.5)

680 

(39.5)

사우



20

(27.8)

7

(16.7)

33

(50)

11

(26.2)

25

(34.2

188

(52.8)

25

(75.8

166

(76.9)

75

(61.5)

128

(71.1)

34

(73.9)

34

(64.2)

6

(85.7)

282

(77.5)

1042

(60.5)

합계

1

16

97

42

66

42

73

363

33

216

122

180

46

53

7

364

1721

   

서원은 선현을 봉사하는 사()와 교육활동을 위한 재()가 결합한 것으로 핵심기능은 제향과 교육이었다.

초창기 서원은 교육 기능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 당파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당쟁의 시기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공론정치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공론의 형성이 중요

다. 향촌 사림들의 집결지였던 서원은 향촌 공론의 형성지이기도 했던 까닭에, 서원을 장악하면 향촌공론을 

악해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사할 수 었었다. 이때문에 중앙의 정치세력들은 자파의 서원을 이용하여 정치적 여

론을 불러 일으키고, 이를 이용하여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획책하였다. 이런 이유로 각 당파들은 지방에 

자파 소속의 서원들을 경쟁적으로 확장해 나갔고 지방 사족들도 중앙권력에 기대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고 서원설립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이것이 붕당정치가 격화된 숙종대에 서원,사우들이 집중적으로 건립된 정치,사회적 이유였다.


서원이 당쟁의 중심이자 군역을 피하려는 자들의 소굴이 되고 각종 특혜를 이용해서 국가 재정을 좀먹자. 조정은

서원 난립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서원의 설립은 나라의 허락을 얻도록 했고, 영조17년에는 승인을 받지 않고 설

립한 180여개의 서원을 허물어버렸다. 이후 허락없이 서원을 건립하거나 추향하면, 철폐하고 출향시켰으며, 앞장

선 주모자는 유배시키고 막지 못한 지방관들은 처벌하였다. 


정조이후 금령이 완화됨에 따라, 서원들의 난립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시기는 강학중심인 서원보다는 제

향중심인 사우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조정의 금령을 피하면서, 재정 지출이 막대한 서원 대신 향촌에서 가문

의 권익을 지키고 경제적 이익이 솔솔한 사우가 더 현실적 선택이었다. 

서원과 사우가 안된다면, 향현사는 이들과 별개라는 구실로 영당, 이사, 서당, 서재, 정사, 세덕사등으로 우선 세

우고 니중에 유림의 공론을 구실삼아 서원이나 사우로 승격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18,19세기에 이르면 기존 서원들조차도 향촌사회가 문중중심으로 돌아가고. 재정이 고갈됨에 따라 많은 비용이 

드는 강학 대신 제향 중으로 기능이 바뀌어 갔다. 그결과 숙종대 이후 설립된 서원의 70%이상이 사우였을 정

도로 서원과 사우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즉 조선 후기들어 향촌사회에서 서원, 사우, 영당, 이사, 서재, 정사, 세덕사등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정 역시 이들을 같은 묶음으로 파악했고, 그 때문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때 이들은 동일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설립은 조정의 승낙을 얻어야 했다. 따라서 설립된 서원의 명단을 기록한 관찬 서원록이 존재

다. 현재 존재하는 조선조 서원들의 총 수를 기록한 문헌들도 이 서원록을 바탕으로 하고, 개인들이 만든 자료

들을 더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 총수를 보면 <증보문헌비고> 674개, <조두록> 701개, <동국원우록> 587개등 대략 600-700개로 기록하고 있

다. 또 일제시대 기록들인 <전고대방>등도 680 여개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원 수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자료들이 적지 않다. 

고종3년 미사액서원들을 철폐할때, 경상도  각 고을의 철거상황을 조사작성한 <도내각읍 서원훼철 사괄성책초>

를 보면, 경상도 66개 고을에서 미사액 서원들인 서원,사우,향현사 505개를 철훼했다고 쓰여있다. 이는 기존 

료에 의거해 작성한 통계에서, 경상도 원 총계인 320개를 2배 가까이 뛰어넘은 숫자다. 더구나 320개에는 

후에 철거되는 사액서원들까지 포함된 숫자인데도 말이다. 

더구나 <증보문헌비고>, <조두록>등 기존자료들은 시기별로는 정조대 이후에는 서원 건립이 거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을 보면, 영조17년 서원철훼조치가 점차 완화되어 정조, 순조대에 다시 서원들이

남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훼철된 서원의 복설은 물론이고 영조가 향현사 설립을 엄금했음에도, 향현사란 

름으로 일단 설립한 뒤 기회를 보아 서원으로 올리곤 하였다. 

이런 현실이었기에, 대원군의 서원철폐에 항의했던 영남 소두 정민병은 경상도 서원 수만 600여 개라 하였으며

대원군의 측근은 전국 서원 수를 1700여 개라 하였던 것이다.

이에 윤희면은 기존의 알려진 자료에 읍지, 고문서, 문집, 지표조사등 각종 자료들을 취합하여 통계를 재작성하

였다. 이 표에는 당시 사람들의 통념을 반영하여 서원, 사우, 영당, 향현사. 생사당, 정사, 이사, 효사, 세덕사등을

모두 포함하였는데, 그 총수는 1700여 개소에 달하고 있다.


사족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나치게 격하된, 조선의 위대한 개혁가인 대원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종10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은 끈질기게 서원 복설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종은 만동묘 복설외에는 모두 물

리쳤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유림은 서원을 대신하여 단, 서당, 정자, 영당등을 세워 서원기능을 이어가려고 

다. 이조차도 세울 형편이 안된다면 서원터에 유허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경제력 있는 후손들은 따로 재실을 워 

그 기능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문중과 지역유림을 중심으로 돈을 걷어 서원을 복설하는 경향이 성행했다. 서원의 복설을 

막을만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집안의 위세과시와 재산문제등이 얽혀있었다.


참고)

1.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저/ 2004년/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