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우리들에게는 연대는 도회적 이미지였고 고대는 토속적 이미지였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연대를 선호했었다.
그 연대가 있는 곳, 주변의 이화여대, 서강대와 같이 대학촌이 형성된 지역..그곳이 신촌이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신촌은 지금도 가볼만한 곳이다. 변함 없는 것은 젊은이의 광장이라는 것이다. 그곳에는 꿈과 희망, 불안과 절망이 떠
다닌다.
일찍이 신촌을 주목한 인물이 있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하륜이다. 신생 조선의 도읍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던
시절 그는 무악산(오늘날의 안산) 아래 허허벌판인 신촌을 고집했다. 무엇 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가까이에 양화진
이 있어 조운과 해상무역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상업과 무역이 국부의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권자
정도전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연세대는 경영대, 의대를 알아주고 고려대는 법대를 알아주었는데 지금도 그런 지는 모르겠다.
연세대 신촌캠퍼스
1번지역)영빈 이씨 묘역 정자각과 광혜원
영빈 이씨 묘역 정자각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으니, 소인의 이 말은 어미로서 차마 못할 일이지만 성궁(영조)을 보호하고 세손(정
조)을 건져 종사를 편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내리소서" (한중록)
운명의 그날, 영빈 이씨는 울면서 영조에게 자식인 사도세자의 처단을 호소했다. 영조38년 5월 나경언의 고변으로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경악했다. 고변장에는 왕손의 어미(세자의 후궁 박씨)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에 들였으며, 관서
로 유람을 가고, 시전 상인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등 세자의 허물 10여 가지가 쓰여 있었다. 고민
하며 불면의 나날을 보낸지 20여일째..영빈 이씨의 목매인 호소를 들은 영조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끌려온 세자는 뒤주
속으로 들어갔고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한채 8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5월 13일 나이 28세였다.
아들이 죽은 뒤, 영빈 이씨는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며 한탄하다 자식의 3년상이 끝난 그 다음날 눈을 감았다.
궁인 신분으로 영빈에 봉해졌고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사도세자다. 향년 69세다.
그(사도세자)의 어머니가 만고에도 없는 지경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가 만고에도 없는 의리를 행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으며, 세손 역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너의 조모가 백세에 의리를 세웠으니, 일거에
종사가 다시 존재하고 의리가 크게 밝혀졌다고 하겠다..내가 의열로 표시한 것은 너의 조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의
대의를 위한 것이다. (영조실록 40년 9월)
영조는 영빈를 위해 후궁 제일의 예로 장사지내고 시호를 의열이라 지었다. 무덤과 사당은 시호를 따서 의열묘라 이름했
다. 고중세 동양인들은 사람은 음양이 뭉쳐 형기를 형성하고 죽으면 양의 기운은 하늘로, 음의 기운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믿었다. 이 때 양의 기운을 혼이라 하고, 음의 기운을 백이라 하는데, 혼을 모신 곳을 사당(廟), 백을 모신 곳을 무덤(墓)
이라고 한다. 영빈의 사당은 의열묘로 불리다 정조12년 선희궁으로 바뀌었는데 청와대 내 칠궁에 있다. 무덤을 쓴 곳은
이 곳인데, 이자리는 세종 2년,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위해 지어준 연희궁 자리다. 연산군 때 폐쇄되었는데, 영조 때에 이
르러 영빈이씨의 묘로 조성되었다. 대한제국 광무3년 사도세자의 4대손인 고종에 의해 수경원으로 승격하였다.
수경원은 1970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겨가고 그자리에 대학교회(루스채플)가 들어섰다. 능 안에서 3개의 석함과
두벌의 지석, 한 벌의 명기가 출토되어 정자각 내에 전시되어 있다.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과 비각은 현재 뜰안에 보존되어
있다.
의열묘 현판
무덤에서 출토된 명기
출토된 석함과 그 속에 든 도기로 만든 지석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의 자세한 전말은 알 길이 없다. 영빈의 청은 실록에 실려 있지 않고, 나경언
의 고변서는 불태워졌다.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직후 세손의 청으로 사라졌다. 실록의 기록역시 변변치
않다. 가장 상세한 기록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인데, 이 책은 혜경궁이 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진
혐의를 벗기려는 의도에서 집필한 것으로 일부 왜곡도 있어 사료로서 평가절하된 인상이다. 하지만 홍봉한과 관련된 기록
들을 빼면 드문드문 실린 실록의 묘사와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여전히 사료로서의 가치는 높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의 정설은 당쟁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친소론적인 사도세자의 태도에 위기감을 느낀 노론의 음모로 죽었다는 것이
다. 허나 실제 근거는 미약하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비행 전모를 안 것은 세자를 죽이기 20여일 전에 터진 나경언의 고변서
를 통해서 였다. 영조는 분노했다. 아무도 그에게 세자의 비행을 일러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조정의 신료들은 모두 죄인들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 나로 하여금 원량의 과실을 알게 했는데 여러 신하 가운
데 내게 고한 자가 한사람도 없으니 부끄럽지 않는가?"
<한중록>,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직후 반포한 반교문, 남인 박하원이 정조에게 바친 <천유록>등에는 세자가 환관,나인,
노비등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명이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참혹한 형상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등등
의 기록이 나온다. 한마디로 미친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사도세자가 정동장애(조울증),강박.불안장애, 화병등의 중증 정신질환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세자 자신
도 알고 혜경궁도, 영빈도, 신료들도 알고 있었다.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는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고 때렸다. 불로 지
지는 고문도 가했다. 주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 정도라면 오늘날에도 약물과 입원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수준이다.
만일 이런 자가 왕이 된다면...절대 왕정에서 왕은 무소불위다. 또 종신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왕을 통제할 수 없다. 신료들
은 공포에 떨 것이다. 정상적인 통치는 기대할 수도 없다. 결국 반정이나 반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절대 왕정에서 반정
은 패악한 군주를 몰아내는 긍정적 기능도 한다. 세자가 폐위되면 아들인 세손도 같이 쫓겨난다. 결국 세손을 지키려면 세
자를 죽여야 한다. 폐세자하고 살려둔다면 두고두고 세손의 골치덩어리가 될테니 말이다. 이 것이 영조를 포함한 왕실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광혜원
광혜원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으로 갑신정변때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민씨 척족 민영익을 살려낸 미국인
알렌에 의해 고종 22년 세워졌다. 이후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원래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집이었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어 졸업생들을 배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대 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교의 시초다.
운영이 어려워진 광혜원을 미국인 독지가 세브란스가 후원하면서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이 건
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소실되었다가 1987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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