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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답사기 2편/ 그들이 남긴 것들 그리고 1996년 연대사태

정암님 2018. 2. 4. 16:13

 

 

 

 

 

 

 

 

 

 

 

 

 

 

 

 

 

191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가 설립한 경신학교의 대학과정인 조선기독교대학

에서 출발하여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개명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앨런이 설립한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1957년

통합하여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2011년 인천 송도에 제2캠퍼스를 열고 학부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1년간  송도

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게끔 만들어 신촌의 활력을 떨어뜨렸다는 원성을 샀다.

 

우선 용어 정리부터 하자. 로마카톨릭(천주교)에서 종교개혁으로 떨어져 나온 프로테스탄트는 개신교라고 부른다. 카톨

릭과 개신교를 합쳐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칭한다. 개신교는 사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카톨릭 사제들이 신

대리자를 참칭하며 자신들의 배만 채워 신의 참뜻을 왜곡하였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

는 성서를 직접 탐독하면서 신과의 직접 접촉을 기도한다. 목사는 단지 신도들이 그 길을 가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사

일 뿐이다.

 

개신교는 1876년 개항이후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종교들은 세를 확장하고 이미지를 고양시키기 위해 

여러 부가 사업을 전개하는데 자선(고아원,양로원,구호기관), 교육(학교설립), 의료(병원설립, 의료봉사)사업등이 대표

적이다. 조선에 상륙한 선교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와 병원, 구호기관과 교회를 설립하고 이를 기점으로 포교에 

나서면서 이땅 근대사 현장 곳곳에 그들의 손때가 밴 흔적을 남겼다. 

 

 

 

 

 

 

                                                              3번구역) 언더우드가 기념관

누군가는 연대의 숨겨진 보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단 외진 곳에 있어서 한적하다. 낙엽을 바닥에 깔고 단풍으로 단

장한 고택의 어느 가을날 풍경을 나는 사랑한다.

이 집은 1927년 지어진 언더우드 2세(원한경)의 사택이다. 1976년까지 언더우드 3세(원일한)가 살았다. 1976년 언더우

드가는 연대 주변 대지 1만평과 함께 이 건물을 연대에 기증했고, 연대는 이 곳을 기념관으로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원래는 2층집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파손된 것을 복원하면서 다락방이 달린 단층으로 만들었다 한다.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916년 병으로 사망하여 양화진 외인 묘지에 묻혀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

는 미국인인 언더우드가를 추방했고 이 과정에서 지분의 상당수를 헐값 처분해야 했다. 현재 언더우드가의 지분은 없다. 

 

                          

 

                          4번 구역) 교육과학관/ 1996년 연대 사태 때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었던 종합관

 

한국 변혁운동사에서 학생운동의 비중은 지대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운동의 최선두에 섰고 무수한 

헌신적 운동가들을 배양한 요람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양지에 우뚝 섰지만, 폭압정권의 폭력과 고문에 이름없이 쓰

러진 자 그 얼마인가...

학생운동이 퇴조한지 30여년..학생운동사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주사파를 어떻게 평가할 지를 놓고 의견

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은 학생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민주화투쟁 이슈가 반미로

옮겨가는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운동권 내에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두개의 큰 그룹이 형

성되었는데 PD계열은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사회이므로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로 가자는 입장이었고 NL계열은 

반()식민지 봉건사회이므로 민족해방투쟁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주사파는 범NL계열에 속했지만 자체조직인 

구학련과 자민투를 중심으로 투쟁을 선도하여 운동권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주사파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기

반으로 한 새로운 투쟁론을 퍼트렸다. 운동가의 품성과 헌신을 중시하고 지하서클이 중심이었던 투쟁조직을 공개 대

중조직으로 전환시켰다. 87년 6.10항쟁이후 주사파는 전대협과 한총련의 주류로 부상했다. 이즈음 1991년 소련붕괴,

1994년 김일성 사망과 김정일 세습, 1993년 문민정권 출범등으로 운동권의 입지는 갈수록 줄어드는 데도 주사파는

독단적 통일운동쪽으로 운동방향을 몰고갔다. 통일운동 자체가 정부의 적극적 협조 없이는 진척되기 불가능한데도

이들은 정부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그 결과 공권력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내부적으로 간부중심의 조직운영과 폐

쇄적 독단적 운영. 비판을 불용하고 자파외에는 적으로 간주하는 이분법적 사고, 북한과 김씨 부자에 대한 환상과 추

종등 점차 다원화, 민주화되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은 폭력투쟁 안에서 맴돌았다.

한 시기 주사파가 남긴 이런 문화는 작금의 정치빠돌이 형성의 한 원인으로 작동했고. 열광적 지도자 숭배사상과 비

, 토론 배제의 반 지성적 문화는 작금 한국정치문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한총련은 1996년 8.15 범민족대회 개최를 위해 연대에 2만여명을 집결시켰다. 8월17일 경찰은 2만 병력을 동원해 연

대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시위대를 과학관과 종합관으로 몰아넣었다. 8월 20일 오전 4시부터 시작된 진압작전으로 

종합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날 경찰은 3499명을 연행했고 8월12일부터 연행한 자들과 합친 5848명 중 462명을 

속하고 3341명은 불구속 입건, 373명은 즉심, 1672명은 훈방했다. 단일 사건 최대 입건자 수였다. 

이 사건은 서서히 가라앉던 학생운동 몰락의 결정타였다.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원래 한총련은 각

학교의 단과대 학생회장까지 대의원 자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적단체로 규정된 후에는, 힉생회장에 당

선되면 바로 이적단체 구성원이 되어 국보법위반으로 걸리기 때문에 당선 즉시 경찰서에 가서 한총련 탈퇴서를 제출

해야 했다. 이렇게 한총련의 조직은 붕괴되었다. 더구나 이해말 각대학 총학 선거에서 비한총련계열이 48%를 장악했

다. 또 저학년생들이 상당수 입건되어 운동의 연결고리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한총련은 이런 충격을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이 앞에 서있는 교육과학관은 그 시절의 종합관이다. 1층에서 6층까지 층층마다 쫓기면서 끌려간 새내기들의 땀과 눈

물이 부디 이 땅의 역사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를 소망해 본다.

  

참고)

1. NL현대사/  박찬수 지음/ 인물과 현대사/ 2017년 간

2.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한 NL 운동가의 회고와 성찰)/ 이명준 저/ 바오/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