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프랑스를 고립시켜라/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

정암님 2019. 1. 29. 06:18



보불전쟁 후 비스마르크가 추구한 대외정책의 핵심은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외교로 독일에 유리하게 유럽의 세력균형질서를 주도하는 것만이 독일의 안정과 번영을 이룰 수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871년,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견제하던 프랑스를 격파하고 파리를 점령했다. 이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 독일제국의 황제로서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의 할양을 강요하여 프랑스에 씻을 수 없는 굴욕감을 주었다. 이제 프랑스와 적대관계는 상수가 되었다. 또 하나, 독일에는 지정학적 딜레마가 있었다. 독일은 유럽의 중앙에 위치한다. 하지만 동서 국경 양쪽에 적의 침입을 견제할 수 있는 자연방벽이 없었다. 이는 독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동서 양면전에 취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치르는 전면전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실제로 독일은 1.2차 대전에서 이런 상황에 처했고, 이는 독일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의 5대열강은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였다. 비스마르크는 이 조합에서 다수인 3개 열강 쪽에 독일이 항상 위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와의 적대관계는 상수였다. 영국은 영예로운 고립노선을 고수해 동맹 대상으로 유효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우방이었으니 관건은 러시아였다. 또한 러시아와 적국이 된다면 그토록 우려했던 동서 양면전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발칸을 놓고 분쟁중이었다. 숙적 프랑스의 진영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가담하지 않고, 그 두나라를 독일쪽으로 끌어오는 것은 지난한 과제였으나 1873년 비스마르크는 이 두나라와 3제동맹을 결성했다. 비스마르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중, 삼중으로 동맹국들을 얽어놓았다. 1879년 비밀방위동맹을 체결한 독일-오스트리아 2국동맹, 1881년 독일-러시아- 오스트리아 2차 3국동맹, 1882년 이탈리아 가담으로 독일-오스트리아 2국동맹의 3국동맹으로의 확장, 1884년 3국동맹 연장, 독일과 러시아가 각각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침입을 받을 경우 서로 중립을 보장한다는 1887년의 독러 재보장조약등이 연이어 체결됐다.


한편으로 비스마르크는 주변국을 안심시키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특히 영국을 안심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통일을 달성한 이상 더 이상의 확장은 자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식민지 획득 경쟁에 뛰어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경쟁은 기왕에 획득한 성취를 위험하게 하고, 주변국에 인정받고 신생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인 독일에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 독일이 식민지 경쟁에 나선다면 영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비스마르크 체제는 영국의 명예로운 고립 정책에 의해 암묵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만큼, 영국의 해양패권에 대한 도전은 유럽의 세력균형과 안정을 뒤흔들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재정 소요도 과중한 부담으로 여겼다. 프랑스에 대한 배려도 잊지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곳에서 프랑스의 야심을 만족시켜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유럽 중앙에 대한 프랑스의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한편, 영국과의 식민지 경쟁을 불붙이려고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을 부추겼다. 


오스트리아를 러시아에 맞서게 하고, 러시아는 발칸에서 오스트리아의 모험주의를 견제하게 했다. 영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지중해 팽창을 저지했다. 이런 식으로 비스마르크의 다중외교는 유럽 열강들을 서로 견제하게 하면서 독일의 고립을 막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독일 견제에 나서지 않았다. 특히 영국은 이런 독일 노선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자신들의 노선과 동일시했다. 즉 독일이 프랑스를 압박하고, 러시아를 묶어두려는 자신들의 노선과 행보를 같이 한다고 보고 영예로운 고립 노선을 지켜나갔다.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은 유럽에서 패권국가로 가는 잠재력을 신장시키고 있었으나, 영토 확장이나 정복이라는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통일 이후의 현실적 국력을 감안한 생존책으로 철저한 현실정치였다. 


1880년 독일이 유럽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로, 프랑스의 13%, 러시아의 3%를 능가했으나, 영국의 59%에는 압도당했다. 1890년 독일의 몫은 25%로 늘고, 프랑스.러시아는 각 13%와 5%에 머물렀으나, 영국은 여전히 50%를 차지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독일의 몫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1900년 34%로 영국의 37%에 육박했다. 프랑스. 러시아는 각 11%. 10%였다. 1903년이 되자 독일은 36.5%로 영국의 34.5%를 추월했다.20세기로 들어오면서 독일은 유럽의 잠재적 패권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비스마르크의 소극적 외교는 지속될 수 없었다. 독일 국내에서 유럽의 세력균형을 바꾸려는 팽창의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1887년 29세의 젊고 야심찬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등극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독단적 성격을 혐오했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1890년 3월 사임했다. 새로운 독일은 팽창을 원했다. 영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전한 산업생산력은 넘처나는 상품의 소비시장으로써 식민지를 요구했다. 그들은 독일도 다른 강대국들처럼 세계분할에 참가할 권리와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해군력이 필요했다. 독일의 공세적 해군력 증강에 영국은 긴장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기존의 명예로운 고립 노선을 벗어나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숙적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맺었다. 빌헬름2세는 비스마르크의 친러사아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군부가 가세했다. 이들이 보기에 러시아는 갈수록 반독 성향을 보이며 프랑스에 접근하고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방전쟁을 통해 제압해야 할 상대로 비쳤다. 그들은 예방전쟁은 빠를수록 좋다면서 비스마르크의 동맹정책이 지나치게 신중하고 나약하다고 비난했다. 1890년 황제는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러시아는 곧 프랑스와 2국협상을 체결했다. 1907년 영국은 숙적 러시아와 2국협정을 맺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반독일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이로써 독일이 고립됨과 동시에 그토록 두려워하던 양면전이 현실화되었다.


참고)

1.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한겨레출판 간

2. 낙엽이 지기전에/ 김정섭 지음/ MID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