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가 떠나고 유럽의 국제질서가 요동치자, 각국은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을 원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차피 터질 전쟁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각국의 전쟁준비에서 백미는 작전계획이었다. 작전계획은 당시 유럽 군부 엘리트들이 조국의 안위를 걸고 고안해낸 전쟁준비의 결정체였다.다른 한편으로 이 계획들은 당시 인물들이 가졌던 오판과 단견의 집약체이기도 했다.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무엇보다 전쟁의 성격에 대해 잘못 생각했음이 개전 초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독일이 준비한 슐리펜계획의 결함은 치명적이었다. 총참모부의 몇몇 전략가들이 주도한 이 구상은 정책 수단으로 출발한 종이 위의 계획이었지만, 나중에는 독일 정부의 정책 방향을 좌우했고, 종국에는 유럽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작전계획은 흔히 슐리펜 계획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 내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몇 차례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독일의 안보국방 정책에서 러시아 및 프랑스와의 동시 전쟁은 상수였다. 비스마르크 시절에 대 오스트리아, 대프랑스 전을 승리로 이끈 몰트케는 두 전선에서의 동시 전쟁 전략을 입안했다. 그는 독일이 프랑스, 러시아와 동시 양면전을 치른다면 두 적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총력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에 전술적이고 단기적인 패배를 안긴 후 외교나 강화를 통해 전쟁 수습을 하도록 정치적 선택의 여지를 주는 전략을 고안했다. 이를 위해 독일군 전력을 동부와 서부전선에 균등하게 배치하고 방어전을 치른 뒤, 한쪽에서 먼저 승리하면 다른 쪽에 전력을 돌려 양측에서 제한된 승리를 취한 후 정치 타협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안이었다.
슐리펜 계획
1891년 참모총장이 된 슐리펜은 군사 주도권을 적에게 허용하는 이 계획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한 방어와 제한적 승리 후에 정치적 타협을 모색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사작전이란 모름지기 전광석화처럼 승리를 쟁취하여 적에게 조건없는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렇다면 방대한 영토의 러시아와 강력한 요새로 버티는 프랑스를어떻게 상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슐리펜은 프랑스를 먼저 신속히 제압한 후 러시아를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즉 동시 양면전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한다는 안이었다. 그는 방대한 영토와 부실한 철도로 러시아군의 동원이 최소 6주가 걸린다고 봤다. 또 병력 동원이 채 안된 상태에서 러시아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줄 수도 없었다. 더구나 러시아는 전략적 종심이 깊어 장기전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고려됐다.
슐리펜은 러시아가 병력을 동원하기 전에, 독일군의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 배치해 프랑스를 먼저 공격해 제압하기로 했다. 병력배치 비율은 서부(프랑스)와 동부(러시아)가 7 대 1이었다. 허용된 시간은 40일 남짓...전광석화같은 승리는 가능할 것인가? 문제는 국경 지대에 포진한 프랑스군 요새였다. 이 곳에 대한 정면 공격은 자살에 가까웠다. 따라서 우회공격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서부전선 공세에서 양 날개를 펼치듯이 프랑스군을 포위하되 메츠 북쪽의 우익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고 남쪽 좌익은 최소 병력으로 방어한다는 것이 기본 구상이었다. 즉 메츠를 중심으로 북쪽(우익)과 남쪽(좌익)에 7 대 1로 병력을 불균등하게 배치해서, 프랑스군을 알자스로렌이 있는 남쪽으로 유인한 뒤 압도적 우익이 적의 측면을 크게 돌아 알프스에 프랑스군을 가두고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다.
슐리펜이 물러나고 몰트케가 후임 참모총장이 되었다. 비스마르크 시대 참모총장이었던 삼촌 몰트케와 이름이 같았던 그는 슐리펜 계획의 몇 부분을 수정했다. 먼저 프랑스의 주공이 예상되는 알자스로렌 지방을 지키는 좌익에 병력을 보강했다. 이로써 우익과 좌익의 비율이 7 대 1에서 3 대1로 줄어들었다. 개전 후에는 동부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우익의 주력에서 2개 군단을 빼냈다. 이는 치명적 실수였다. 결국 우익의 1군과 2군 사이에 40km의 간격이 생겼고 연합군이 이 틈을 파고듬으로써 독일군은 패퇴했고 이후에는 길고 지루한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 과단성 있는 계획이 과연 예상대로 작동할 것인가? 독일군의 역량을 서부전선에, 다시 우익에 집중하는 슐리펜의 계획이 수정이 없었더라면 통했을 것인가? 슐리펜계획은 실패했다. 실패의 원인은 몰트케의 수정이 아니라 계획 그 자체에 있었다. 이 계획이 안고 있는 치명적 결함을 검토해보자.
첫째, 매우 경직된 시나리오였다.
1차대전 개전 당시, 독일 군부의 전쟁 시나리오는 슐리펜 계획뿐이었다. 플랜 B가 없었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 전쟁을 결정했다면정해진 순서와 방식대로 수행해야만 했다. 상황에 맞게 변경하거나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전쟁이 시작되는 상황과는 무관하게 반드시 프랑스가 첫번째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비스마르크의 악몽이 "양면전이 발발하면 어떡하는가?"라면 슐리펜의 악몽은 "양면전이 발발하지 않으면 어떡하는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가령 전쟁 초반에 프랑스가 중립을 선언하고 러시아가동원을 끝마친 후에 참전한다면 독일은 낭패를 겪게된다. 슐리펜 계획의 기본 구상이 틀어지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중립을 외치는 프랑스를 먼저 공격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따라서 독일은 프랑스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요구조건을 내걸어 프랑스의 적대 반응을 유도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1차대전 발발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둘째, 매우 정교하게 짜였지만, 전투의 전개양상에 대한 전망이 지나치게 단순했다.
프랑스 제압에 6주를 설정했지만, 이는 프랑스군의 대응만을 고려한 것이다. 벨기에의 결사 항전을 예측 못했고, 영국의 개입을 막는데도 실패했다. 중립국 벨기에 침범이 갖는 정치 외교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벨기에 , 네덜란드등 저지대 국가는 영국이 자국의 사활이 걸린 지역으로 간주하는 곳이다. 영국해협에서 영국을 마주보는 최단거리 지대로서 양질의 항구들을 보유하고 있어, 영국 침략의 교두보가 될 뿐아니라 영국해협을 통제가능해 영국의 통상망을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벨기에가 침공당하면 영국은 주저없이 참전했다. 일단 참전하면 프랑스가 항복하더라도,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
셋째, 타 정부 부처와의 소통 부재, 그로 인한 전쟁 목적의 부재
슐리펜 계획은 총참모부의 독단으로 비밀스럽게 만들어졌다. 외상이나 수상은 물론이고 해군이나 육군 내 다른 조직과의 협의도 전무했다. 슐리펜 계획은 그가 퇴임한 1906년에 메모 형태로 만들어진 것인데, 전쟁성은 1912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계획의 존재를 알았을 정도다. 따라서 전쟁은 정치의 한 수단임에도 이런 비밀주의로 인해 군사작전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 즉 전쟁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내부합의가 없었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유럽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피의 댓가로 독일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합의가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외무성에서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는 적의 무조건 항복만을 목적으로 한 끝없는 소모전이었다.
넷째, 전쟁의 마찰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슐리펜은 병참의 악몽, 프랑스의 재빠른 병력 재배치, 뜻밖의 지루한 참호전 등 일찍이 클라우제비츠가 역설한 전쟁의 마찰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그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 순수한 군사적 판단, 수학적 엄밀함은 장점이 아니라 한계로 작용했다. 그는 근본 가정에 대해 의심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지나치게 전승 아니면 전패라는 제로섬 마인드에 갇혀 있었다.
다섯째, 당시 유럽의 지형과 군사기술이 방어에 훨씬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간과했다.
슐리펜 계획은 공격 우위 믿음의 산물이었다. 만약 신속한 돌파와 단기전이 가능하지 않다면 6주만에 프랑스를 격파한다는 계획은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지형과 기관총, 대포등의 군사기술은 방어에 훨씬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공격우위의 믿음은 허상이었다. 눈부신 전격전도 없었고 선제 동원의 이점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정책 결정자들이 이같은 방어 우위의 현실을 알았더라면 상대보다 먼저 동원에 나서야 한다는 강박감도 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교적 해결을 위한 시간과 여유도 더 주어졌을 것이고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고)
1.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한겨레출판 간
2. 낙엽이 지기전에/ 김정섭 지음/ MID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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