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제국으로 떠오른 15세기 이래 끝없이 영토 확장에 매달렸다. 영토 확장은 한편으로는 지정적 위치에서 기인한 안보 취약성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 바다나 산맥 등 자연 방벽이 없는 평원에 위치한 러시아는 영토를 외곽으로 확장해 전략적 종심을 길게 함으로써 인공 방벽을 삼았다. 이는 팽창 아니면 피침이라는 러시아에게 주어진 숙명에 따른 팽창주의였다.
러시아의 역사는 팽창 아니면 피침의 역사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자연 방벽이 없는 대평원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를 향한 침략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한 방향은 남서부 스텝지대이다. 장애가 없는 초원지역으로 러시아를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 연결하는 지역이다. 이 길을 따라 스키타이, 흉노, 몽골 등 초원유목민족들이 처들어왔다. 다른 방향은 프랑스 북부에서 모스크바를 넘어 우랄산맥까지 이어지는 북유럽평원이다. 독일의 튜튼기사단부터 나폴레옹, 히틀러 등 서방세력들의 침공로였다. 러시아제국의 역사는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는 전통적 침략로를 둘러싼 팽창과 수축, 다른 말로 투쟁의 역사였다.
북유럽평원
카르파티아산맥과 병목구간으로 이루어진 러시아의 서방쪽 장벽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 서쪽 안보의 사활 지대인 카르파티아 산맥을 손에 넣었다. 동유럽의 알프스라 불리는 카르파티아 산맥은 그 자체로 러시아 서쪽 안보를 위한 자연 방벽이 될 뿐 아니라 이 산맥의 북쪽 끝에서 발트해까지 이어지는 지대는 평탄한 북유럽평원이 가장 좁아지는 병목구간이다. 직선거리로 약 48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지금은 폴란드 영역이다. 러시아에게는 서쪽에서 침공하는 유럽세력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어선이었다. 이 선을 지나면 북유럽평원은 다시 깔대기 모양처럼 넓어진다. 남동쪽으로 활처럼 휘어진 카르파티아산맥의 동쪽 기슭을 따라 다시 광활해지고 남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와 연결된다. 러시아로서는 이 카르파티아산맥-발트해 선이 돌파될 경우, 러시아의 유럽쪽 영토 전체가 노출된다. 방어선도 극히 길어진다.
폴란드는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서방세력들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위치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서쪽으로 나가는 회랑이었다. 러시아가 회랑을 장악하면, 효과적 방어선이 될 뿐만 아니라 전략적 종심을 지니게 된다. 폴란드 회랑이 돌파되도 모스크바까지 광활한 지역이 완충지대가 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이를 여실히 보여줬다. 침략군은 모스크바에 도달할 즈음엔 유지 불가능한 긴 보급선을 가지게 된다. 그때부터 그들은 전쟁 수행 능력을 잃고 일패도지했다. 러시아는 1813년 아제르바이잔을 합병하여 캅카스산맥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남쪽 방면의 자연 방벽과 전략적 종심 구축도 완성했다. 캅카스산맥 북쪽의 광활한 스텝지역이 완충지대가 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지형 방벽을 확보해서 전략적 종심을 구축하는 것이 러시아 안보정책의 본질이었다.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카르파티아산맥, 남쪽으로는 캅카스산맥과 흑해, 동쪽으로는 광활한 시베리아평원의 동토, 북쪽으로는 북극해가 러시아의 지형적 방벽이자 전략적 종심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이는 피로써 이룬 성과였다. 러시아는 지난 500년 동안 평균 33년에 한 번씩 전쟁을 치렀다.
소련이 붕괴된 뒤, 카르파티아 산맥 동안의 몰도바,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발트 3국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떨어져 나갔다. 심지어 발트3국은 나토 가맹국이다. 러시아는 천연 장벽인 카르파티아산맥과 전략적 종심을 상실하고 서쪽 앞마당이 나토에 열려있다. 남쪽의 캅카스산맥일대는 유지했지만 체첸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서쪽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러시아는 서진 중이다.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내전에서 친러파를 지원하고 있다.
적색 점: 러시아(소련) 해군 기지
팽창 정책에 필요한 해군력 투사와 취약한 물류를 보강하기 위해 러시아는 남하정책과 부동항 확보를 추구해 왔다.
러시아가 접한 바다는 북극해, 태평양 연안, 발트해, 흑해가 있지만 모두 유사시 대양으로 진출이 막혀 있다. 북쪽의 북극해는 1년 내내 얼어붙는 바다다. 태평양 연안 역시 대부분 1년에 절반 이상이 얼음으로 뒤덮인다. 더하여 모스크바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육로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블라디보스톡 역시 부동항은 아니다. 또 사할린과 일본 열도가 에워싼 동해에 갇힌 항구다. 발트해 역시 대양으로 나가지 못한다.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 등이 대양으로 나가는 좁은 출구를 통제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은 흑해연안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과 오데사이다. 하지만 이 역시 터키의 보스포루스해협과 다르다넬스해협이 봉쇄되면 대양은 커녕 지중해로도 나갈 수 없다.
러시아 입장에서 대양으로 나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지금의 이란과 파키스탄에 접한 아라비아해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러시아가 체첸전쟁을 시작으로 조지아, 우크라이나 등 흑해 연안 주변에서 계속 분쟁을 벌이는 근본 이유 중 하나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은 해양세력 영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해군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해외기지 조차, 건설에 나섰다. 이 시기 소련은 북해, 태평양,발트해, 흑해에 더해 지중해와 인도양에서도 상시 해군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허장성세였음이 드러났다. 거기다 조차된 해외 기지들이 신뢰성이 없었다. 조차권을 상실했는가 하면 쿠바나 베트남 등지에 확보한 기지는 주변 미군에 의해 바로 봉쇄됐다.
소련 해군력은 소련이 가진 지리적 취약점으로 인해 유사시에는 거의 힘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소련 해군력이 본토와 연결된 통로들인 발트해, 북해, 흑해, 그리고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은 유사시 서방 해군력에 의해 간단히 봉쇄되는 곳이다. 즉 유사시에 소련 본토 해군력은 대양으로 진출하기도 힘들고, 진출한다고 해도 본토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본토와 떨어진 지중해와 인도양의 조차기지 해군력은 사실상 고립무원으로 서방 해군력에 쉽사리 무너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제국 성립 이래 팽창은 지정적 취약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는 또 다른 지정 문제를 야기하는 원천이 됐다. 안과 밖에서 안보 비용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안으로는 확장지를 단속하고 경영하는 비용이, 밖으로는 경쟁국들의 반발과 봉쇄로 인한 안보 비용이 늘어난다. 러시아 안보의 딜레마다.
발췌 요약)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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