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갑오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군들의 독특한 모습들

정암님 2019. 7. 2. 14:44


매천 황현(1855-1910)이 지은 오하기문에는 동학군들의 특이한 형태들이 기록되어 있다. 한 번 읽어보자.


도적(동학 농민군)들은 가는 곳마다 관아의 건물을 부수고 문서와 장부를 불태워버리는가 하면, 병장기를 탈취하고 관청의 재물을 약탈했다. 수령을 사로잡더라도 바로 죽이지 않고 항쇄족쇄를 씌운 다음 심한 치욕을 안겼다. 또한 아전의 경우에도 죽이지는 않되 곤장을 때리고 , 주리를 틀고, 발에 차꼬를 채우는 형벌로 고통을 주었다. 일반 백성에게는 먹을 것이나 짚신 같은 것을 달라고 했을 뿐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났고, 도적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졌다./ 갑오년(1894 고종 31년) 3월 3일


이때 관군과 도적(동학농민군) 양쪽은 모두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오로지 민간에서 먹을 것을 구했는데, 강제로 할당한 뒤 갖다 바치게 했다. 도적의 진영에는 음식 광주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관군은 굶주린 기색이 뚜렷했다./ 갑오년 4월 7일


도적(동학농민군)들은 처음 들고일어났을 때 민간의 재물은 약탈하지 않고 군읍만 약탈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은 기대에 부풀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곧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그러나 장성에서 승리하고 전주를 함락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약탈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전주에서 물러난 뒤에는 전라좌.우도에 널리 흩어져서 민간의 말과 노새, 화약을 장전한 화살이나 화살통, 창과 칼 같은 각종 무기를 모조리 쓸어 깄다. 추종자들은 날로 불어났으며, 한데 모여서 흩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민들은 더욱더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주문을 외우면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고, 부적을 몸에 지니면 칼날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하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촌아이를 신령한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모든 폐해를 없애준다고 속였다. 그리하여 들고일어나서는 간악한 도적이 되었고, 싸움에 임해서는 등에다 승승이라고 쓰고 (죽지 않는다고 속여 사지로 몰아) 이 속임수에 빠진 무리를 모두 죽게 만들었다. / 갑오년 5월 10일


동학에 물든 지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겁을 먹고 납작 엎드려 사태를 관망하던 사람들까지 이때부터 한꺼번에 일어나 다들 도인이라고 자칭했다. 이들은 어깨에는 중들이 사용하는 법의를 걸치고, 머리에는 마래기를 쓰고, 목에는 염주를 걸고, 몸에는 부적을 붙이고 , 입으로는 주문을 외고, 말과 노새를 가리지 않고 타고, 총칼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떼를 지어 몰려다녔는데, 그 수가 엄청났다. 그들은 상대방을 접장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존대했으며, 또한 상대에게 자신을 표현할 때는 하접이라고 했다.

동학도들은 귀천과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서로 대등하게 두 손을 마주모아 잡고 인사하는 예를 법도로 삼았다. 그리고 포군은 포사 접장, 미성년자는 동몽 접장이라고 불렀다. 노비와 주인이 함께 입도한 경우에도 서로 상대방을 접장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평등하게 대했다. 그 때문에 대체로 집안에서 부리는 사노비, 역참의 아전과 심부름꾼, 무당의 남편, 관아에서 물을 긷는 사람 등 사회적 신분이 낮은 부류가 가장 좋아하며 추종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난 뒤부터는 입도했다고만 하고, 주문의 암송 여부는 별로 따지지 않았다.

동학도들은 일반 백성을 가르켜 속인이라고 했는데, 속인 가운데 동학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위협을 가해 동학에 들어오도록 만들었다(늑도). 이런 행위는 어느 누구라도 그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 도가 대단하다고 함께 칭찬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평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동학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행했다. 제사상에는 단술과 생선, 과일 세접시만 올렸고, 닭고기와 개고기는 먹지 못하게 했다. 개는 나쁜 고기로 여겼으며, 닭을 꺼린 까닭은 머지않아 계룡산 정씨가 흥성할 터인데 행여 왕기를 손상시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반드시 용왕에게 제사를 올려 산줄기를 보호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몸에 이름표를 달았지만, 인원이 늘어난 뒤로 이름표를 달지 않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동학을 배울 때는 반드시 사례금으로 돈 2꿰미를 접주에게 바쳐야 했다. 법도를 정할 때 이미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동학에 입도하는 절차 또한 간편했다. 그 무리에 한번 들어가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심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고, 개인 간의 사사로운 빚을 받아내고, 부자를 위협하고, 사대부를 욕보이고, 수령을 꾸짖어 조롱하고, 아전과 군교를 강제로 결박하는 등 한껏 기세를 올리면서 그동안 쌓인 굴욕과 원한을 마음껏 풀었다.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자들과 도둑질 하던 놈들, 그리고 패륜아들이 동학에 들어갔다. 어쩌다 부자들 또한 들어갔는데, 이는 약탈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약탈을 면할 수는 없었다. 오직 사대부만이 죽을지언정 동학에 들어가지 않고 사방으로 달아나 숨었다.

동학도들이 내리는 형벌에는 참형, 교수형, 곤장을 치는 곤형, 볼기를 치는 태형은 없고 단지 주리를 트는 주뢰형만 있었다. 설령 큰 죄를 진 경우라도 죽이지 않고 다만 주리를 틀면서 도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저들의 속뜻은 가혹한 고문을 통해 재물을 빼앗는 데 있었다. 비록 평소에 죄악이 뚜렷해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죽여야 할 놈이라고 외치더라도 돈을 많이 내놓으면 풀어주었다. 그 일당이 법을 어길 경우에는 또한 죽이지 않고 대개 종아리를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면서 도인은 동료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료 가운데 부자가 있으면 다른 부자에게 그랬듯이 주리를 틀었다. 이에 따라 한달 사이에 50개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6000평 가량의 땅을 가졌거나 집안의 재산이 제법 많은 사람은 모두 주리를 당했다. 민간에서는 이를 주리풍년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도적과 일반 백성들이 어우러져 난장판을 이루면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때문에 도적인가 하면 도적이 아니고, 백성인가 하면 백성이 아니었다. 5일 이후 전봉준은 여러 읍을 돌아다니면서 정도가 심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제한하려 했지만 명령이 먹혀들지 않았다. 각기 접을 이루어 오로지 힘이 세고 세력이 많은  자들이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고 했다.

도적(동학농민군)들은 참언에 나오는 궁을을 신봉하여 <궁을가>를 지어 서로 느낌을 공유하고, 포진할 때는 진세를 궁을 모양으로 만들고, 서명의 표식으로는 이름이나 직함 아래 팽팽하게 당긴 활을 그려 넣거나 시위가 느슨한 활을 그려 넣기도 했다. 또 바로 활시위를 그린 다음 그 아래 을자를 써넣어 궁을의 예언에 맞추고자 노력했다. 게다가 예언하는 비결을 많이 만들었는데, 어쩌다 비결과 달리 불리한 일들이 발생하면 그때마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예언에는 그곳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접장이 예언의 내용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패했다." 이로 인해 어리석은 백성들은 꼭 동학에 들어가야 난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으므로 너도나도 믿고 몰려들었다./

갑오년 5월 12일


도적(동학농민군)들은 처음에 고부에서 봉기했기 때문에 그 우두머리는 태인 출신이 많았다. 이런 까닭에 전라좌도와 우도에서는 태인 접을 최고로 쳤다. 다른 접의 우두머리도 모두 태인 출신이라고 속였지만, 사람들은 사실 여부를 판별할 수 없었다. 또 승전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들은 전봉준 등을 따라 고부와 장성 전투에 참가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자들이다. 도적들은 그들의 유공을 추앙하여 특별히 승전으로 부름으로써 존중의 뜻을 표했다. 접들 가운데 이들이 가장 교만하고 멋대로 굴었다./갑오년 6월 26일


이따금 사대부인 주인과 그의 노비가 함께 도적을 추종한 경우 , 서로 상대를 접장이라 부르며 도적의 법도를 따랐다. 백정이나 광대 무리 또한 평민.사대부와 대등한 예를 취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이를 갈았다.

5월 이후로 수령과 사대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도적을 추종했다. 어리석은 백성은 이를 본받아 바람에 먼지만 날려도 스스로 도적에게 가서 복종했고 <동경대전>을 위대한 성인의 저작으로 간주했다. 마을에 강당을 설치하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동경대전>을 열심히 익혔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격검궁을지가>를 유창하게 불렀고,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는 시천주 읊는 소리가 넘쳐났다. 이런 현상은 호남에서 경기까지 천리에 이르는 지역과 길바닥으로 이어졌다. 평민들은 감히 이런 행동을 지적하거나 나무랄 수조차 없었다. 다만 도적을따르는 것을 입도라 하고, 도적 무리를 도인이라고 일컬었을 뿐이다. 도인이라는 두 글자는 익숙해져 당연한 말처럼 되었지만, 모두들 입을 가리고 자제하면서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도적들은 만날 때 서로에게 매우 공손한 예를 행했다.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의 고하를 따르지 않고 똑같이 평등한 예를 행했다. 비록 나약하고 용렬한 사람이 접주 자리에 있어도 그 무리는 모두 자신을 굽히고 그를 섬겼다. 그들은 약탈할 때 재물을 가진 이에게 입도했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우대하여 용서해주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고문과 매질을 배로 늘렸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거짓으로 입도했다고 대답했다. 도적들은 나중에야 그런 대답을 의심하고 입도 경위를 추궁했는데, 이를 연원을 캔다고 했다. 만약 연원이 분명하지 않으면 다시 고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원을 줄줄 외워 두루 꿰고 있었다.

도적들이 스승을 대하는 예절 또한 매우 정중했다. 대체로 보면 최제우와 최시형 등에 대해서는 모두 그 이름자를 기휘했다. 최제우를 가리킬 때는 제자 우자라 했고 시형은 시자 형자라 했다. 접주를 가리킬 때도 마찬가지로 기휘했다.간혹 별명을 부르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를 사용하여 어떤 어르신, 어떤 분이라고 불러서 듣는 사람을 구역질나게 만들었다.

도적들은 매번 싸울 때마다 패배를 꺼려 했다. 특히 피살되는 것을 가장 꺼렸다. 사상자가 천여 명에 이르면 그 수를 수십 명이라고 줄였고 , 백여 명이면 몇 사람이라고 줄였다. 접전하다가 포탄에 맞아 쓰러지면 반드시 땅속에 묻어 흔적을 없애버렸고,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도인은 죽거나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때로는 불로 옷을 태워 구멍을 내서 마치 탄환에 맞은 것처럼 만들고 "탄환마저 살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며 서로를 속이고 홀렸다. 이 때문에 고부와 전주가 함락될 때부터 운봉과 하동의 전투까지 실제 관군 사망자는 거의 없고 오직 도적에서만 죽은 자들이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도적들은 도리어 이런 사실을 몰랐다.

/ 을미년(1895) 6월 25일


이때 계절은 이미 가을의 끝 무렵이라 옷을 마련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도적들 대부분이 옷감을 요구했지만, 김개남은 모두에게 다 지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 한 사람마다 가짜 명령서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는데, 마치 이름을 적지 않은 공명첩 같았다. 도적들은 이것을 가지고 각 고을로 뿔뿔이 흩어져 현지 사정을 염탐한 다음, 적당한 숫자를 집어넣고 군수전이라면서 징수해 가 옷감으로 사용했다. 민간에서는 도적들에게 약탈당한 지 이미 네댓 달이 되었으므로 재화가 모두 동난 상태였다. 그로 인해 이즈음 도적들의 구타와 고문이 매우 참혹하고 지독해졌지만, 도적들 또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1000꾸러미를 배정하면 40~50꾸러미를 징수하는데 그쳤고, 심부름값으로 100꾸러미를 불렀지만 10꾸러미를 받는데 그쳤다. 도적들은 마을에 들어가면 반드시 발을 감쌀 천과 머리를 싸맬 천을 요구했는데, 베짜는 베틀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우르르 몰려가서 제멋대로 베를 잘라 가지고 갔다. 이런 탓에 시골 부녀자들은 함부로 베를 짜지 못했다./ 1894년 9월 18일


우두머리 가운데 교활한 자들은 서로 엄밀히 단속하며 평민을 협박하여 억지로 동학에 가입시킨 뒤 그들로 인원을 추원하고 부대 맨 앞에 내세웠다. 이 때문에 하동과 운봉 전투에서 평민들이 많이 죽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억지 가입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35냥 이하의 속전을 징수했다. 가난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미 바칠 돈도 없고 또 매질이 두려워서 붙좇아 따랐으며, 사대부로 의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모두 집을 비우고 달아났다. 10월에서 11월에 이르는 동안 억지로 동학에 가입시키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전라좌도 사람들은 흉악한 기세에 떠밀려 모두 억지로 동학에 가입했다./ 1894년 10월 28일


불학은 남학이라고도 한다. 몇년 전 처음 생겼는데 주창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동학과 더불어 봉기했지만 가르침은 달랐다. 그러나 법회를 할 때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며 어지럽게 춤을 추고 껑충껑충 뛰면서 주문을 외우는 모습은 다르지 않았다.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남쪽 문을 열고 바라를 두드리면 닭이 울고 산천이 밝아오리라"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큰 소리로 꼭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다. 노래는 대부분 합창을 했는데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들은 이것을 노래하고 춤추면서 배운다고 했다.

입교하는 사람들은 음식과 술을 풍성하게 준비하여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제사가 끝나면 여럿이 실컷 먹고 마셨다. 먹고 남은 것이 있으면 땅에 묻어버리고 평민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그들은 꿈속에서 극락세계를 유람했다면서 , 취하면 두 번씩 잠을 자며 꿈꾸기를 바랐다. 그러나 끝내 꿈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학에서 빠져 나온 이들이 점점 불학으로 모여들었다. 땅을 생업의 터전으로 여기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되려고 하는 것은 동학이 처음 일어났을 때와 비슷했다. 대체로 이들 또한 동학과 같은 부류였다. 사로 잡혀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불학에 들어가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을미년(1895) 3월 29일

*불학당(남학당)은 동학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여 충남과 전북지역에서 포교가 이루어진 종교 조직인데 동학당과의 관련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갑오농민혁명기에 동학과 별도로 농민혁명에 호응하는 연합 봉기를 꾀했다. 농민혁명 이후에는 동학과 같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남학당의 일부는 제주도로 건너가, 조세 수탈에 항거해서 일어난 방성칠의 난(1898년)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발췌)

1.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황현 지음,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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