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이 발발할 즈음 세계 주요 국가들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 동맹관계에 따라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전쟁에 뛰어 들었다. 1차대전이다. 당시 참전국들의 수뇌부는 전쟁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 역시 7월 28일 개전한 전쟁이 낙엽이 지기 전까지는 끝날 것이라고 낙관했다. 따라서 비축된 자원은 고작 1~2년 분에 불과했는데 전쟁이 그 이상으로 길어지자 참전국들은 재원 조달을 두고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참전국들은 전쟁 기간 동안 막대한 전쟁 채권을 발행했다. 이 중 상당량은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국민들에게 떠넘겼다. 남은 물량은 연합국의 경우 런던이나 뉴욕같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처분했다. 반면 국제금융시장이 없는 독일, 오스트리아는 부족한 자금을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통해 해결했다. 금본위제는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는 귀금속의 양 내에서 은행권을 발행해야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 이 원칙이 지켜질 리가 없었다. 사실상 금본위제는 무력화되었다. 그 결과 인플레가 기승을 부렸고 식량난 속에 발생한 혁명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승전국들은 독일에 1,320억 금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였다. 이 금액은 전쟁 전 기준 독일 국민총생산의 3배를 뛰어넘는 액수였다. 신생 독일 정부는 국민소득의 10% 이자 전체 수출액의 80%를 매해마다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기에 재정적자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방대한 재정수요를 민간 차입(국채 발행)으로 해결하기에는 전쟁 중에 한 번 우려먹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신뢰가 바닥나 다시 시행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분위기상 세금을 인상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증발이었다. 즉, 중앙은행에 금이 없는데도 중앙은행권을 찍어내 이 돈을 금으로 바꿔 전승국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보유한 금도 없이, 아니 금을 계속 전승국에 지불하면서도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해외 사정에도 밝은 금융가, 기업가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그들은 곧 휴지조각으로 변할 독일 마르크화를 파운드나 달러로 환전해 해외에 예치시켰다. 그 결과 독일은 1922년부터 자본수지 적자가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마르크 환율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환율이 급등하면 수입물가가 폭등하고, 수입물가 폭등은 전체 물가폭등으로 이어졌다.
1920년 이후 독일에서는 월간 기준으로 물가가 50% 이상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다. 연구에 의하면 1차대전 이후 독일의 물가 상승율은 1조 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살인적, 전무후무한 인플레로 중앙은행권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망가졌으며, 사람들은 월급을 받는 즉시 현물을 사기 위해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힘들게 일해 받은 월급의 가치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독일인들은 돈의 가치을 부정하고 돈으로 된 모든 형태의 부와 고정수입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로의욕이 사라지고 저축욕구, 미래에 대한 희망등을 버리면서 경제도 붕괴됐다. 1923년 독일의 산업생산은 1914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허나 독일의 하이퍼인플레는 해외채권, 즉 파운드나 달러로 발행된 채권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달러나 파운드에 대한 마르크 환율도 급등해버려 외채에 대한 상환 부담은 하이퍼 인플레 이전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 전후 누적된 독일 국내의 모든 부채는 청산되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고정적 연금 수입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으며, 애국심으로 독일 정부의 채권(국채)을 구매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의 재산을 날렸다. 반면 토지나 공장등 실물자산을 가진 자들이나 다른 이에게 빚을 진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실물자산을 보유하면서 다른 이에게 큰 빚을 진 경제주체는 정부와 기업 딱 둘뿐이었다. 결국 독일의 하이퍼인플레는 대다수 국민을 거덜내면서 국가와 기업의 배를 불렸고, 이는 이후 히틀러의 전체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1920년대의 하이퍼인플레는 독일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독일인들은 인플레에 극히 민감하며 독일 중앙은행은 최우선적으로 인플레에 대응한다. 작금의 유럽에서 독일 중앙은행이 양적완화에 소극적인 배경이다.
참고)
1.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홍춘욱 저/ 로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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