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중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촉과 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서진왕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족들 사이에 내분이 터졌다.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왕족들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부르는 북방 이
민족의 군대를 불러 들였다. 서진왕조의 허약한 치부를 본 이민족들은 창끝을 서진왕조로 돌렸다.
140년간 다섯 오랑캐(오호)가 16개의 나라를 세우고, 멸망당했다. 그들은 용맹했지만 잔인했다. 자신들
을 멸시했던 한족에 대한 원한도 잊지 않았다. 피가 피를 부르던 시대,어제의 승자가 오늘은 패자가 되어
그 일족과 함께 처참한 죽음을 당하던 시대였다. 내일이 없었던 그 어두운시대에 삶의 덧없음을 설파하
던 불교가 뿌리내렸다. 오호들은 다투어 불교를 숭상했고, 중들은 왕들을 미륵불이라고 추켜세웠다.
당시 불교는 귀족불교였다. 현실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던 귀족들의 최대 관심사는 내세였다. 그들
은 현재의 복락이 내세에도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것을 파고든것이 미륵상생신앙이다. 현세에서 계율만
잘 지키면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서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다.그러나 중국인은 현세적이었다.
그들은 미륵이 하생해서, 미륵불이 되어 현세를 낙토로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피와 살육의 시대를 살았
던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을 중들과 왕들은 적절히 이용했다. 곧 왕이 하생한 미륵불이며 천하를 통일해
서 낙토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도처에 왕의 얼굴을 한 미륵불들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었다. 수나라였다.하지만 염원했던 낙토는 아니었다. 전쟁의 피바람과 가혹한 수
탈은 끝이 없었다. 사람들은 절망했다. 중들은 서둘러 이 더러운 땅에, 이 말법의 시대에 미륵은 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대신 어디서든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부른다면, 정토는 그들의 것이라고 속삭
였다.이제 아미타를 부르는 소리가 도처에 가득하였다. 민초들은 하루라도 빨리 정토에 가기를 소망하
며 아미타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신라는 진흥왕이래 왕권강화 이데올로기로 가장 적합했던 미륵사상을 적극적으로 설파해 나갔다. 신라
는 미륵이 상주하는 미륵정토이고 왕은 미륵불이라고 선전했다. 그래서 였을까? 마침내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군까지 격파해서, 전성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죽은 자들은 수를 헤아릴수 없었다. 민초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졌다. 중국과 비
슷한 상황이 도래 한것이다. 이제 아미타사상을 퍼트려서 죽은자들을 위로하고,민초들에게 내세의 희
망을 주어야 했다. 전란의 7세기,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 방패가 떠 다니고,죽은 자들이 산처럼 쌓였다
는 그시기에 아미타사상은 국가의 적극적 지원아래 퍼지기 시작했다.
무열왕릉 입구에서 1.5Km정도 약간 가파른 산길을 한시간여 걸으면 정상부위의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삼존불을 만날수 있다. 이 삼존불은 좌우 협시불이 관세음과 대세지 보살로 인정되어 가운데 주존
을 아미타불로 해석한다. 신라에 아미타사상이 퍼지던 7세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아미타불
로는 매우 초창기 작품이란 소리다.
서산 마애삼존불과 유사한 점이 많아, 그것을 저본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
아미타는 얼굴을 잃었다. 복원 높이를 7m정도로 추정하는 경주인근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아미타의 얼
굴은 누가 훼손한 것은 아니다. 암벽자체가 잘 부스러지는 안산암이라 자연박락현상에 따른 파손이라
한다.
대세지 보살
관세음 보살
협시보살 두구는 크기가 약 4.6m 정도로 국내최대라 하는데, 암벽의 석질이 좋지 못하여 같이
새기지 못하고, 다른산에서 화강암으로 만들어 벽에 세워 둔 것이다. 덩치가 커서 감실부분과
보살상 두부분으로 분리해서 조각했다가, 여기서 조립해서 세웠다. 사진상에서 확인 가능하
다. 이 협시보살들은 몇개의 조각으로 갈라져 게곡아래에서 굴러다니던 것을 복원한것이다.
깨진 보살상들을 붙여놓은 선들도 보일 것이다.
아미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무열왕릉이 보인다
불상을 조성한 사람들은 여래의 눈길이 자신들이 염원하는 곳을 항상 보살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보통 여래의 시선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데, 시선은 무열왕릉을 향하고 있다. 여러 조건상 문무왕이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만들지 않았을까?
이곳은 또한 법흥왕이래 김씨왕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데다, 경주의 서쪽이다. 서쪽은 아미타의 서
방정토가 있는곳이니 여러모로 아미타와 연관이 있는 곳이라 하겠다.
보물 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
1.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최완수 지음/대원사
2 답사문화의 길잡이/한국문화유산답사회/돌베개
3.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김봉렬 지음/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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