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그리스 로마사

소크라테스는 왜 고발당했나? 민주정을 비난하고 독재정을 옹호한 자

정암님 2013. 12. 3. 03:38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장이 아테네법정에 접수되었다. 고발장에는 그가 국가의 신을

믿지않고 다른 신령을 믿었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이 매우 유려하고 설득

력이 있어 소크라테스조차 자신이 유죄가 아닐가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하나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이외에도 다른 죄목이 거론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소크라테스는 국가공직의 추첨제를 비판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제도를 경시하게 했다.

2.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더 유용하다고

    하여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했다.

3. 소크라테스는 국가에 큰 해를 끼친 크리티아스나 알키비아데스같은 자들과 제일 친했다.

4. 호메로스의 시구를 악용하여 젊은이들을 오도시켰다.

 

고발자는 무명의 비극시인 멜레토스였으나, 리콘과 아니토스가 공동고소인으로 적혀 있었다.

이중 아니토스는 소크라테스와 친한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정적이었다. 따라서 진정한 고소자는

아니토스였다. 그는 아테네 민주파의 지도자가운데 한명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니토스의 공격목표가 될만한 여러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를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진 것은 델포이의 신탁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카이로폰이 스승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느

냐고 신탁을 청했더니 없다는 답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신탁을 실험하기 위해, 지혜롭다

는 자들과 논쟁을 벌여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어 그들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들속에 아니토

스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와 그 주변의 무리들은 아테네 민주정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적국인 스파르타체

제를 찬양하고, 아테네 민주정의 핵심인 공직추첨제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의 제자인 크리아티스는 얼

마전까지 독재체제인 30인 과두정을 이끈 핵심인물로, 민주파에게 살해당한 자였다.

입담이 좋고, 청년들에게 인기가 좋은 소크라테스가 공공광장에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서 민주정을 비난

하고 다니는것은, 간신히 과두정의 반란을 진압하고 체제를 정비하려는 민주파의 입장에서는 눈에 가시

였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파는 소크라테스를 정치적 명목으로 처단할수 없었다. 그것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정파와 맺은 대사면령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의 언동에서 종교적,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을 걸어서 고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아니토스의 고발은 개인적 원한과 정치적,사상적 대립,그리고 과두파에 대한 민주파의 반감이 응어리

져 나타난 것이다.

 

그리스 민주정은 처음에는 자산가중심이었다. 전쟁이 터졌을때 자산가들은 스스로 무기와 갑옷을 구매

착용하고 전쟁터에 나가 적들과 싸웠다. 그리스군은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중장보병이 군대의 핵심이었

다. 갑옷과 무기를 사지 못할정도로 돈이 없는 자들은 군대에 갈수가 없었다. 따라서 공직을 맡을수 있는

참정권은 자산가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니 정치가 그들 위주로 진행될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터졌다. 아테네는 해군을 육성하여 페르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배를 저으려면 많

은 노잡이들과 선원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무산자들로 채워졌다. 전쟁이 끝나자 무산자들은 자신들의

전공에 맞는 권리를 요구했다. 아테네 민주정이 개화되기 시작했다.

 

민주정은 명목상 시민모두가 참가하는 민회가 최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

고사는 자들은 민회에 참가할수 없었다. 하루일을 포기하면 그날은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한단 말인가..

새로운 민주정은 그들이 민회에 참석하면, 일당을 지급했다. 무산자들도 민회에 참가할수 있게 된것이다.

자산가들의 입지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참정권은 지금까지는 귀족과 자산가들의 몫이었다. 페르시아전쟁이후, 모든 공직은 임기1년의 추첨제

로  바뀌었다. 시민이면 누구나 공직을 맡을수 있게 되었다. 단 전문성이 필요한 장군과 신관은 선출제

로 뽑았다.

 

아테네민주정의 특징은 아마추어리즘이다. 선동정치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무능하고 탐욕스런 자

들이 공직을 수행하는 폐단도 나타났다. 평화시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는 달랐다.

 

기원전 431년 숙적 스파르타와 전쟁이 터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됐다. 민주

파의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후, 선동정치가들이 민회를 좌지우지하면서 전쟁전략이 수시로 뒤

바꼈다. 유산자들은 종전을 바랐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세금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친

스파르타파가 되었다. 무산자들은 전쟁에 열광했다. 그들은 계속 싸울것을 주장했다. 유산자들은 현행

민주정이 너무 많은 권리를 무지하고 게으른자들에게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회를 무력화시키

고 일당제를 폐지하며, 참정권과 정책결정권을 선발된 소수인원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테네는 전쟁에 패했다. 무능하고 전략적 시각이 없었던 자들이 민회를 주도하며 야기한 뼈아픈 실책을

끝내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군이 아테네에 진주하고. 그들의 힘을 배경으로 소수 과두파가

30인 참주정을 구성했다. 그들의 지도자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리티아스였다. 

 

30인참주정은 일당제를 폐지하고 선발된 소수의 인원에게만 참정권을 주었다. 그리고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죽어간 자들중에는 온건 과두파들도 들어 있었다. 도주한 민주파들은 무리들을

무장시키고 아테네로 진군했다. 참주정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스파

르타가 개입하여 민주정의 회복을 허용하는 대신, 각 정파간의 사면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런 타협은 마지못해 한 것일뿐이다. 잊는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용서한다는 것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민주정이 회복된지 4년후, 민주파는 눈에 가시였던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물론 사면령때문에 정치

적 고발은 할수 없었다. 그래서 죄목이 신을 모독한 독신죄였다.

소크라테스는 희극작가가 그를 풍자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아테네인들은 그를 소피스

트로 생각했다. 즉 전통적 신을 부정하고 자연현상에 대해 괴이한 설명을 하면서 궤변술로 그럴듯한

사론을 펴는 기술을 가르켜 젊은이들을 부모에게 반항도록 만드는 자라고 여겼다.

따라서 독신죄는 그럴듯한 죄목이었다.

 

아테네의 재판에는 직업적 재판관도 검사,변호사도 없었다. 피고와 원고는 스스로를 변론해야 했다.

재판은 배심원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민사재판은 201명,401명으로 구성되고 형사재판은 501명,1001

명순으로 편성된다. 배심원들은 재판당일추첨으로 뽑혔고, 일당이 지급되었다.

재판은 하루내에 모두 마치는데, 1차투표에서 유무죄를 결정하고, 여기서 유죄가 판정되면 원고와

피고가 각기 형량을 제안하여 2차투표에서 결정한다.

 

소크라테스에게 호의적이었던 과두정파는 대부분 아테네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배심원들은 대부분

민주파였을것이다.

 

소크라테스는 1차변론에서 자신은 어느한 당파에 가담한 자가 아니라면서, 민주파에도 친구가 많다

고 주장했다.  1차투표결과는 281대 220표로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소크라테스는 아니토스가 고발인이었기에 자신은 죽을것을 각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차가 근소

하게 나오자,으기양양해진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오만이 살아나면서, 원고가 사형을 요구하자, 자신은

사형은 커녕 국가유공자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태도에 배심원들은 분노했고 2차

투표결과 371대 140표의 압도적 다수로 사형이 결정되고 말았다.

 

그 한달후 그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그의 나이70세..당시로서는 오래 산 편이었다.

민주파는 사형까지는 원치 않아서, 탈출을 돕겠다고 제안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

다. 그는 왜 죽음을 고집했을까? 한 책자에는 국법이 금지하더라도 아테네에서 철학하는 사람으로 남

겠다라는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고, 다른 책자에는 아무리 악법이라도 어기게 되면 법질서가

무너지므로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한다. 준법에 대해서 모순되는 말이다. 알수없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쓴 스승에 대한 변명뿐...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상당히 미화되었을 것이고  재판의 진상은 알 길이 없다.

그가 죽고 나서도 아테네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던 것같다. 위대한 사상가의 죽음에도 사회에 별다

른 파문이 없었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소크라테스의 비극이요 아테네의 비극이라 하겠다.

 

참고)

1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김진경 지음/  안티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