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그리스 로마사

도편추방제..시작에서 폐지까지

정암님 2019. 1. 8. 15:27

 

 

 

                                                      투표에 사용했던 도편들 (출처:위키백과)

 

기원전 508년 참주정을 타도하고 아테네의 권력을 장악한 클레이스테네스는 또다른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했다. 도편이란 도기(테라코타) 파편이다. 당시의 종이는 파피루스를 재료로 만든 것이라 가격이 비쌌다. 반면 도기는 아테네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일 정도로 흔했고, 그 파편은 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아테네인들은 이 도편을 투표 용지로 사용했는 데, 가지고 다니는 작은 칼로 도편에 문자를 새겨 의사표시를 하였다. 여담이지만 오늘날에도 투표지에 O, X로 가부를 표시하는 나라들이 상당수인데 2500년 전에 도편에 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문자로 표시했다니 아테네 시민들의 식자율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문맹자도 많아서 글을 아는 이에게 누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클레이스테네스가 집권하던 시절에는 도편추방제가 실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8년 뒤부터 도편 추방에 의한 희생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차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아테네 정가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절치부심하고 있는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었다. 자산가가 주류인 온건파는 아리스티데스, 메가클레스, 크산티포스, 히파르코스가 주도했다. 강경파는 평민들이 주류였고 테미스토클레스, 밀티아데스가 이끌었다. 온건파는 페르시아를 자극하지 말고 외교를 통해 협상을 하자는 의견이었고, 강경파는 페르시아의 침략은 기정사실이니 싸울 준비를 시급히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기원전 487년, 시간이 촉박하다고 느낀 테미스토클레스는 강수를 꺼내들었다. 도편추방제를 쓰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히파르코스를 시작으로 메가클레스, 크산티포스 마지막으로 기원전 482년 아리스티데스를 추방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 시기에 건조한 삼단갤리선 200척으로, 아테네는 2년 후인 기원전 480년에 발발한 2차 페르시아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 후 도편추방제는 정적을 제거하는 주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도 기원전 471년 추방당했다. 마지막 도편추방은 기원전 417년에 일어났다. 이해는 대립하던 두 정적 가운데 한 명이 도편추방을 당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둘 사이에 밀약이 이루어져 전혀 관계없는 제3자가 추방당했다. 내막이 폭로되자 아테네 시민들은 격분해 도편추방제를 폐지해 버렸다. 입법된 지 85년이 지나서였다.

 

도편추방제의 목적은 독재 정치를 막고 민주정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 따른 추방 대상은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 해를 끼치는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이는 사법기관이 아니라 정치기관이 판단할 문제였다.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에서 투표로 결정하는 이유다. 하지만 남용의 가능성도 높기에 클레이스테네스는 여러 제약조건들을 달아두었다.

첫째, 투표의 목적은 아테네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국외 추방하는 것이다.

둘째, 이 목적에 따른 투표는 1년에 1회로 한다.

셋째, 투표에 참가한 사람이 6,000명 이상이 되어야 하고 6,000명이 넘지 않으면 정족수 미달로 성립되지 않는다.

넷째, 투표자의 과반수가 이름을 적은 자를 10년 동안 국외 추방에 처한다.

 

도편추방자는 범죄자가 아니기 때문에 재산을 몰수하지도 않았고 가족은 아테네에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었다. 10년간 재산을 관리할 사람을 임명할 수 있고, 송금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10년간의 해외 생활은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도편추방제가 노리는 속내다.  물론 10년이 지나면 당당히 귀국할 수 있고, 스트라테고스처럼 행정관으로 재선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민회에서 결의하면 10년이 안되도 귀국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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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과반수 3,000명은 유권자의 몇 %나 될까? 아테네의 유권자는 4만명에서 6만명 정도였다. 이 중 최소 기준인 6,000명 정도가 참가해 투표가 성립한다면 과반수인 3,000명은 4만 명의 약 7.5%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편dl추방제는 실제로 유권자 7.5퍼센트의 의사표시로 결정된 것이다.

 

요약)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역/ 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