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격동의 근세사) 동족마을의 형성과 문중서원의 난립

정암님 2016. 1. 1. 04:24


17세기 당쟁의 여파로 많은 서원들이 난립하면서 사회적 폐단을 일으키자, 영조는 180여 개의 서원을 허물고 이

후 나라의 허락을 얻지 않은 서원의 신설 금지, 추향 금지, 사액 억제라는 강경한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정조 

이래 법이 완화되자, 유림들은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 서원건립을 강행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이후 조정의 승

을 받지 않은 서원들이 다시 난립하였는데 대부분은 특정 마을을 기반으로 동족촌을 이루고 사는 동성동본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특정 선조(시조,중시조,파조,입향조,증직자, 삼강행실인등)를 모시는 문중서원이었다.

이시기에 난립한 문중서원이 조선 전기간에 설립된 서원,사우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로 문중들의 서원서립은 붐

을 이루었다.


17세기는 당쟁의 영향으로 난립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영조, 정조대 이후 당쟁이 수그러진 상태에서 서원이 다

시 난립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더구나 난립한 서원의 대부분이 문중서원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영조 17년의 금령이후 세워진 서원의 상당수는 동족마을에 기반을 두고 문중이 배출한 인물을 향사하는 문중서

이었다. 동족마을은 동족부락, 씨족부락,동성마을등의 용어로도 사용되며 대체로 하나 혹은 여러 개의 동성동

본 성씨집단이 특정마을에 주도권을 쥐고 집단거주하는 경우를 가르킨다. 이런 동족마을은 신분에 따라 반촌,

인촌, 민촌등으로도 구분하지만 동족마을이라 할 때는 거의 반촌을 가르킨다.

동족마을의 형성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동족마을의 형성 배경으로는 상속제의 변화, 주자가례

의 보급, 예학의 발달, 종법 제도의 수용등을 들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상속제도는 균분상속이었다. 따라서 사위가 처가의 터전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고 외손봉사도 일

적이었다. 이러던 것이 17세기이후 성리학적 예제의 보급으로 적장자 중심 상속제로 바뀌어 갔다. 그 결과 장

자가 부모의 터전을 이어받게 되고, 시간이 감에 따라 종손 중심으로 동성동본 친족집단들이 모여 살며 동족마

을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으로 동족마을의 형성은 당대의 사회적 배경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조선 후기 격렬했던 신분제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사족들은 자체 방어수단으로 족적 결합을 공고히 해 신분 질

를 유지하려 했다. 이 경우 어떤 특정 성씨집단이 마을의 주도권을 쥐면서 동족마을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는 

그 의 조상이 관직이나 학문, 또는 지명도에서 다른 성씨집단을 압도하였기 때문이었다.

동족마을은 내부적으로 족적 결합을, 외부적으로는 자기 문중의 사회적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 문중계, 족계등

의 조직을 구성하고 족보와 문집등을 간행하였으며 재실,정자등을 건립하고 동족 유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

고 과거비용을 보조하였다. 그리고 마을의 기반이 강해지면 경쟁적으로 문중서원을 건립하였다.


16,17세기의 서원들은 대개 향촌의 공론을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서원 설립에 후손과 가문이 관여하기도 했지

만 도학을 우선시하는 분위기였기에 후손들은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이 되자, 동족

을의 형성과 함께 사족들간에 가문의식이 우선시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가묘적 성격이 강한 서원, 사우들의 

이 늘어났다. 

원래 서원에 모신 선현들은 학문이 깊고 유학에 공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당쟁의 격화에 따라 

사원이 난립하자 학문보다는 행위, 충절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을 모시는 서원,사우들이 증가했다. 이는 서원과 

우가 혼용되는 요인이 되었는데,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사족들은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입향조, 현조, 시조, 

중시조, 파조등이나 집안출신의 명망가, 삼강행실자등을 모시는 서원이나 사우를 다투어 건립하였다.

한편 영,정조대의 탕평책으로 붕당정치가 퇴조하자, 서원,사우는 중앙정치와 연결이 어렵게 되었다. 또 신분제

의 변동은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분열을 촉진하고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이에 사족 공동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

보다는 자기 문중의 위세를 높여 향촌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 결과 18. 19세기 각 문

중마다 신들의 문중서원을 경쟁적으로 건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숫자는 조선시대 설립된 서원의 40

%를 웃돌정도로 엄청난 것이였다.


물론 문중서원의 설립의도에는 선조에 대한 제례 목적도 있었다. 예법에는 가묘에서는 4대 봉사만 하고 5대가 

어 가면 친진이라 하여 위패를 땅에 묻어야 했다. 물론 조정이 인정하는 경우 5대 이상도 가묘에 위패를 보존

할 수 있었다. 이런 위패를 불천위라 하고 불천위를 모신 사당을 부조묘라 하는 데 나라에서는 엄격하게 규제

다. 이때 5대이상 선조에 대한 향사를 계속 하기위해 서원, 사우를 건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선조가 증직이나

 시호, 정려등을 받으면 이를 과시하기 위해 서원, 사우를 세웠다. 이 경우의 문중서원은 효행이라는 윤리적 

적과 함께 자신들이 양반의 후예임을 과시하는 사회적 목적이 같이 담겨져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중서원의 설립의도에는 양반 신분을 과시하고 서원을 세울정도로 경제력과 세를 가지고 

다는 것을 보여서 양반특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더욱 강해져 갔다. 그래서 일반 민호들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몰락한 집안에서도 동족의 재물을 모으고 동병상련을 앓고 있는 다른 유림의 협력을 얻어서 힘들게라도 

서원을 건립했다. 여기에는 문중서원을 건립하면 동족마을에 따라오는 경제적 혜택도 주요 동기로 작용했다. 서

원이 건립되면, 그 마을은 서원촌이 되어 면역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18.19세기 문중서원의 난립은 선조의 제례를 이어나가고 동족의 사회적 지위 고양, 양반신분의 과시및 유지, 그

고 잡역과 환곡 면제등 경제적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서원을 건립하고 운영하는 데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서원들은 열악한 재정을 보강하기 위해,  면역특

을 이용하여 액외원생이나 사모속을 모입하여 피역의 소굴이 되었고 수령이나 지역 문중들에게 도움을 구걸

하고 백성들을 공공연하게 수탈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서원의 경우 수령의 경제적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

기 때문에 수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현서원이나 사액서원들도 형편이 예전같지 않아 봉사된 선현

의 자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서원은 대현서원이나 문중서원을 가리지 않고 사족의 이해를 대변해 주는 기구가 아니라 일개 문중의 이

해를 대변해 주는 기구로 전락하였다. 또한 수령에 예속되어 눈치만 살피는 초라한 기구로 변해 버렸다. 자체적

로는 향사된 인물이 하찮은 자들이 많고 운영자들이 문제가 많아  관속이나 고을민들의 비웃음을 사고 외면과 

탈을 당했다. 이렇듯 서원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추락해 갔고 마침내 대원군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 사우들이 문

을 닫고 말았다.


참고)

1.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지음/ 집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