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원의 기능은 크게보면 제례(향사)와 교육이었다. 이외에도 서원은 지역 유림들이 모여 향촌과 나라일
을 논의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장소였으며, 도서를 간행하고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우선 서원의 양대 기능인 제례와 교육을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1.서원의 제례기능
서원의 정기적 제례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 사우는 하정에 지내는 춘추제향이 있고,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묘우의 향촉을 밝히는 삭망분향제가 있었다. 이외에 정알이라 하여 정초에 유생들이 서원에 모여 참배하는
것도 있었다.
부정기적 제례에는 서원건물을 수리할 때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거행하는 이안제와 환안제, 도난,화재같은
불시의 재난을 입었을 때 올리는 위안제, 위패를 새로 봉안하거나 제외시킬 때의 예성제 그리고 사액을 받았을 때
올리는 사액례등이 있다. 그밖에 나라에서 도산서원이나 소수서원같이 유서깊은 큰 서원에 제관을 보내 치제하는
것도 있었다.
제례가 끝난 뒤에는 헌관과 집사는 물론 원임(서원 운영진)과 유생들까지 참석하여 서원에 모여앉아 음복을 하고
제수를 나누어 가졌다. 이를 복주라고 한다. 이어 유회를 열어 서원과 고을의 여러가지 일들을 논의하였다. 가령
원임을 선출하고, 서원유생으로 받아들일 사람들을 추천하고 결정했으며, 서원 건물의 수리와 중건같은 일들도 논
의하였다. 또한 유림사회에 현안이 될만한 정치적 문제나 강상윤리와 연관된 포상과 처벌등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서원의 제례는 중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원의 교육기능이 쇠퇴해 가는 것과 대비해서
서원의 제례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서원이 등장한지 1세기가 안되어 서원은 향사하는 사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잇달았고, 서원과 사우의 구별은 갈수록 모호해져 갔다.
초창기에는 서원과 사우의 기능은 뚜렷히 구분되었다. 서원은 교육을, 사우는 제사(사현)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에 따라 서원에 봉사되는 인물은 사림의 종사이고 학문이 깊은 선현들이었고, 사우는 행위 즉 충절이나 고을에
서 삼강 행실이 뛰어난 지역 인물을 봉사해 기능적으로나 사회적 위상으로나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교육기능이 쇠퇴하자, 제례기능이 두드러지면서 사우와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서원의 교육기능이 쇠퇴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재정부족이다. 서원 재정이 고갈되어 감에 따라 막대한 비용이 드는 교육기능은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다음은 서원교육의 비효율성이다. 초창기 서원교육의 중심은 유생들을 모아 숙식을 시키며 과거공부를 도와주
는 것이었다. 이는 곧바로 비판을 받았다. 비판론자들은 서원의 교육은 과거공부가 아닌 위기지학을 단련하는
데 더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큰 공감을 얻었다. 그러자 과거시험준비를 중시하는 유생들은 미흡하
고 큰 도움도 안되는 서원 대신 사찰이나 사숙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서원의 교육기능도 쇠퇴해져 갔다.
여기에 서원이 난립하면서 서원과 사우에 모시는 인물간 구별이 사라진 것도 이런 경향을 부채질했다.
또한 사회적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양난이후 유학이 사회저변으로까지 보급됨에 따른 선현에 대한 존경의 심
화, 주자학의 절대화, 신분제의 변동에 대한 사족들의 예속강조, 서원제례를 통한 하층민 교화의 필요성등도 제
례기능의 강화에 일조한 듯 하다.
조선후기들어 서원의 교육기능은 더욱 위축되어 가고 서원과 사우의 구별은 모호해지면서 제례기능은 더욱 심
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서원이 사현을 중히 여기고 강독에는 뜻이 없다는 17세기의 지적이 서원,향사가 뒤섞여
서원과 사우를 구별할 수 없다라는 말로 이어지고 19세기에는 지금 서원은 사묘가 되어서 학궁의 옛날 모습은
다시 볼 수없다는 한탄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2.서원의 교육기능
서원의 교육과정은 크게 거접, 강회로 볼 수 있고 이외에 순제와 백일장등이 있다.
초기 서원들의 교육과정에서 두드러진 것은 거접이었다. 거접이란 보통 한달이나 보름정도 10명내외의 유생들
을 서원에 모아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면서 제술(글짓기)과 독서를 통해 과거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외에
매월 삭망에 분향이 끝난 후. 경전을 강독하는 통독이 있었다. 또한 평시라도 서원에 찾아와 독서하는 서원유생
이나 일반유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원생들의 선발 기준을 보면, 초기서원들은 서원유생들의 과거시험보조가 주목적중 하나였기때문에 생원, 진사,
초시입격자(초시 1차시험 합격자)들위주로 원생을 뽑았다. 하지만 서원의 이런 학풍에 비판적 여론이 대두되고
비판자들은 과거공부보다는 위기지학의 단련을 강조했다. 이에따라 원생선발에서 입격과 학행을 병행하더니
점차 학행위주로 원생을 선발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사족이라면 과거 합격이 평생의 목표였다. 서원
의 비효율적 공부에 만족하지 못한 사족들은 서원을 나와 사찰이나 사숙에서 과거공부를 하였고 이는 양질의 인
재이탈과 교육기능의 쇠퇴를 가져왔다.
서원들은 찾아오는 유생들에게 교육장소를 제공하거나 거접외에, 강회도 개설하여 유생들을 교육하였다. 초기의
강회는 매월 삭망에 분향을 마친 후, 유생들이 모여 경전을 강독하는 통독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관직보다 도학을
, 실리보다는 명분을 강조하는 사회분위기속에서 거접이 약화되고 양반유생들이 이탈하자 서원 교육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서원교육을 살리려는 관의 후원아래, 소생하는 기미를 보였는데 이때 서원교육의 중심은 강회
였다. 이 시기의 강회는 몇 날의 기간동안 서원에서 숙식을 제공하면서 수십에서 수백명이 모여 의리탐구를 주제
로 한 독서와 강학을 펼치는 것이었다. 문제는 열악한 재정이었다. 재정의 부족으로 강회를 중단하거나 유생들에
게 자기 식량은 가지고 오도록 하는 경우조차 있었다. 서원들은 강회를 준비하면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별도의
기금을 조성하거나 후원금을 모우기도 했다.
왜 조선후기 서원들은 열악한 재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강회를 개설하려 했을까?
유생들의 교육. 자파의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 확대등의 목적도 있지만 급격한 사회변동기에 향속의 변화와 강상
윤리의 확립을 강회를 통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원들은 기회가 생기는 대로 순제와 백일장을 개최하였다. 백일장과 순제는 봄여름에 개설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순제란 유생들에게 문제를 내주고, 집에서 시부를 작성하여 제출하게 하는 것이고, 백일장은 시험장에서 시부
의 실력을 겨루는 것을 말한다. 성적우수자들에게는 지필묵등을 상품으로 지급하였고 명단과 성적을 책으로 작성
하여 보관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글짓기 교육는 의리탐구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참고)
1.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윤희면 지음/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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