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사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 조선 노비 제도사

정암님 2016. 12. 18. 12:29


2002년 미국의 한국학 교수인 제임스 팔레는 국내 강연에서 조선은 노예제 국가라고 주장하여 한국 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조선의 노비제도는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는 조선사의 어두운 부분이다.


서구 역사학계는 역사발전 단계를 원시공동체-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로 규정한다. 조선이 노

예제사회라면 고대사회라는 소리이고, 이는 조선이 주변에 비해 매우 낙후된 국가라는 소리이니 듣기 좋은 소

리는 아니다. 더불어 한국 역사학계는 조선을 중세 봉건시대로 규정해 왔다. 그럼에도 조선이 노예제국가라는 

장을 반박할 사료적 근거는 빈약하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모든 백성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양천제를 시행했는데, 15세기 이후 전체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다. 이 비율은 신분제가 반상제로 강화되고, 전쟁과 대기근이 닥친 16,17세기 50%를 넘나들다가

18세기이후 10%이하로 급감하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법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여타 국가들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제도는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활용되었던 제도다. 대부분 중범죄자나 전쟁포로를 노예로 했는데

대개 본인에 한정되었고 자손에게 세습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전쟁포로나 범죄자가 아닌 백

성이 세습에 의해 노비가 되었다는 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즉 조선 노비들은 제도에 의해 형성된 신분이었다.

노비는 재산의 일부로서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노예제가 갖는 성격으로 조선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조선의 노비들은 법적으로 재산 소유권이 인정되었고  심지어 다른 노비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노비제도는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삼국시대에는 잦은 전쟁을 거치며 전쟁포로들이 노비가 되었으나, 전쟁이 드물어진 고려이후 세습노비제가 정착

했을 것으로 본다. 고려조에서 노비의 주된 소유자들은 공신 귀족들이었고 그들에게 노비는 재산의 일부였고, 사

병으로서 물리적 힘의 기반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에게 노비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강력한 기득권이었다.

고려는 노비와 양인의 혼인인 양천교혼을 법적으로 금지했고, 부모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

라는 일천즉천제를 유지했다. 그런데 불법이라도 양천교혼이 실제로 일어나니 그 자식들의 소속은 어떻게 해야 할

까? 그 경우 자식은 어미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다.(천자수모법) 즉 양인 아비와 노비 어미의 경우라면 일천즉천

에 의해 자식은 노비가 되는데, 그 자식의 소유권은 어미 노비의 소유주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조선전기까지 이 원칙은 유지되고 있었다. 

노비와 양인이 결혼하면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므로, 점차 노비 인구가 증가하고 국역의무자는 감소했다. 국가재정

에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양반 노비소유자에게는 재산이 늘어나 유리하므로 국가와 양반계층의 이익이 상충되는

제도였다. 국가 이익과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의 유지를 위해 고려의 귀족뿐 아니라 조선의 양반관료계급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그만큼 노비로 인한 경제적 지대가 컸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노비증가와 양인감소로 군역부담자가 줄어들자 1414년(태종 14년) 종부법이 시행됐다. 양인 아비와 노비 어

미 사이의 자식은 일정 기간 보충군에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아비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는 것이다. 관료들은 이 법이

인륜을 어지럽히고 노비인구를 감소시킨다며 반발했고, 결국 1432년(세종 14년) 종부법 대상자를 관료와 여자 노비

사이에 태어난 자식으로 한정시키며 유명무실해졌다. 또한 양천교혼도 사실상 묵인하기로 하였다. 이로서 노비인구

가 크게 늘어났다.

증가하던 노비인구가 감소하게된 제도적 계기는 종모종량법(종모법)이었다.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녀에게 양인신분

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군역부담자의 감소로 국가재정에 부담이 되자 1669년 시행된 이 제도는 시행과 중단을 반복

하다 1731년 영조의 결단으로 확정되었다. 영조와 정조는 종모법외에도 노비 살해행위를 처벌하고, 노비의 신공을 

줄이거나 폐지하며 노비의 추쇄를 금지하는 등 제도를 혁신했다.

이후 노비의 숫자가 급감하며 그 비율이 18세기이후 10%이하로 떨어진다.


18세기이후 노비 수 급감의 원인은?

종모법으로 노비 인구가 감소했고 군역제도의 변화로 군대에 편성된 노비들에게 면천의 기회가 주어졌다.

많은 노비들이 도망쳤고 추쇄의 제한으로 잡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노비에 대한 인식변화였다.

그 배후에는 시장경제의 성장과 인구증가, 양반들이 보유한 경지면적의 축소등이 있었다.

노비제의 가장 큰 단점은 노비들의 생산성이 낮다는 것이다. 받는 것도 없는데 남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조선의 노비들은 대부분 관청이나 주인의 땅을 경작하고 병작료를 내는 납공노비였다. 인구가 적었

던 조선 초기에는 농장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인구가 증가하여 소작 경쟁이 치열해진 조선 후기에는 노비들

의 낮은 생산성이 문제가 되었다. 거기에 노비 관리에 드는 비용등을 고려할 때 소작을 주는 것이 이익이었다.

여러 요인이 겹쳐져서 조선 후기의 노비 가격은 종전 100냥 수준에서 10-20냥 수준으로 폭락했다. 이제 노비들은

약간의 재산을 주인에게 헌납하고 속량하였다. 1801년(순조1년)에는 일부를 제외한 6만6천명의 공노비를 해방시

켜 양인으로 만들었다. 1894년 조선은 노비제폐지를 공식 선언했다.


참고)

1.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시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