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는 관료들에게 봉급 명목으로 전답을 배분해 경작자에게 일정한 수조를 받게 했다. 관료 수가 증가하
면서 나누어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1556년(명종 11년)부터 토지 대신에 녹봉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경국대전>을 보면, 녹은 1년에 네 차례(사계절의 첫달마다) 지급되었고 봉은 월 단위로 지급되었다. 즉, 근무일
수가 녹을 받을 수 있는 3개월이 채워지지 않는 경우에는 봉을 지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매월 지급하
는 월봉제로 바뀌었다. 녹봉은 관료들을 18등급으로 나누어 쌀, 보리, 포등 현물로 광흥창에서 지급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와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통해 실제로 녹봉을 어떻게 받았는지 살펴보자.
유희춘은 1568년부터 1575년까지 7년동안 총 17회의 녹과 1회의 봉을 받았다. 대략 10회분 정도의 녹을 받지 못
했다. 녹봉을 받았을 때도 법령에 규정된 양을 수령한 경우는 6회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규정량보다 적게 받았다.
흉년이 들거나 사신 접대비용이 많이 드는 등 사정이 생기면 조선은 재정이 부족하다며 정량보다 적게 지급했다.
이문건은 녹봉을 받은 횟수가 3회인데, 실제 품계보다 낮은 등급의 녹봉을 받았다.
조선은 국가 재정상태에 따라 관료들에게 녹봉을 제때에 지급하지 않거나 정해진 양보다 적게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부족분을 나중에 메워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하니 조선의 관료들은 녹봉에만 의지해서는 안
정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봉급 수준이 낮은데다, 그것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조
선의 재정은 허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은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갔을까?
유희춘의 일기를 보면 1568년(선조 원년) 1년간 그가 받은 녹봉은 백미 32석, 콩 14석, 보리 6석, 명주 4필, 포 12
필이었다. 반면 이기간 자신의 납공노비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것이 26석, 지방 관리와 친인척들로부터 받은 선물
이 쌀로 환산해 186석, 자기 소유 토지에서의 수확량이 83석이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녹봉은 관리의 주 수
입원이 아니었다. 관료들은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족한 녹봉 대신에 부정부패등 다른 방도를 찾아나
섰다. 특히 지방관들로부터 선물 형식의 금품을 받는 관행을 만들어 지방 아전들과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유희춘은 강직하고 소탈하다고 알려진 사람임에도 10년간 2855회(월 평균 42회)에 달하는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준 사람은 지방관, 동료 관리, 친인척, 제자, 지인 등이었다. 선물에는 곡물, 면포, 의류, 생활용품, 문방구,
꿩, 닭, 어패류, 견과, 약재등 온갖 것들이 들어 있었다. 선물의 종류도 다양했고 그 양도 많아 이것만으로 생활을
영위할 정도였고 , 남은 것은 재산증식에 쓰기도 했다.
오희문은 <채미록>이란 일기를 남겼는데, 그 안에는 임진왜란 중 피난생활에서도 선물 거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충청도 임천에서 1593년 6월부터 1594년 4월까지 머무르는 동안 134회의 선물을 받았다. 강원도 평강
에서는 1597년 4월부터 1598년 3월까지 357회의 선물을 받았다. 임천에서 피난시에는 특별한 연고가 없었으나
평강에 있을 때는 그의 아들이 평강 현감으로 재직중이라 더 많은 선물을 받았다. 오희문이 산물로 받은 곡물은 임
천 피난기에는 62석, 평강 피난기에는 64석으로 나타났다. 당시 그의 경작지 소출이 64석 정도였다는 것, 전쟁 중
이었다는 것, 그가 현직이 아니고 피난 중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큰 규모였다. 관료와 그 일족들은 사실
상 선물로 먹고살았다.
선물을 보내는 사람들은 지방관, 친인척, 지인 등이었다. 지방관은 수령, 첨사, 병사, 관찰사등인데 이들이 보낸 선
물이 절반 이상이었다. 지인들이 보내는 선물은 단순한 예물인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들은 선물을 자기돈으로 조달
하는 것이 아니라 관청의 자금으로 구입하거나 향리들에게 떠넘겼다. 때문에 유희춘은 (지방관의 호주머니에서 나
온 돈이 아니기에)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혼쾌히 받았다. 당시 관료사회에서 이런 선물이 상례적이었고 비용처
리에서도 공사구분이 애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물자를 선물로 요구할 정도로 선물관행이 공공
연했다. 유희춘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어야 할 경우에 인근 지방관에게 부탁해 선물을 대신 보내도록 하
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모두의 재원은 지방 관청에서 부담했다.
선물은 조선 관직사회에서 보편적 관행으로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어 관료들은 선물 수수에 죄책감도, 부담도 가지
지 않았다.
발췌)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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